시(詩)/문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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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다시 정선, 어떤 마을 앞에 서 있었네시(詩)/문인수 2016. 6. 20. 10:28
비 뿌리네 어떤 마을 앞에 서 있네 이 깊은 골짜기 거대한 귓속 같네 큰길에서 가지치고 가지친 샛길, 길 끝엔 한 채씩 집 매달렸네 찌든 허파꽈리 같네 발등에다가 이 마을을 얹고 있는 뒤엣산 몹시 험하네 비안개에 가려 다 보이지는 않지만 높겠네 더러는 팔 뻗어 밀쳤음직도 한 앞엣산, 그러나 끄덕않았을 앞엣산, 그래서 또 호미 걸고 기어오른 비알밭 감자꽃 핀 앞엣산, 앞엣산 더 험하네 더 높겠네 다만 물소리 물소리 빠져나가네 저 물소리 다 닳아 빠지겠네 닳지 않겠네 (그림 : 김명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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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굵직굵직한 골목들시(詩)/문인수 2015. 12. 17. 21:36
마을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작고 초라한 집들이 거친 파도 소리에도 와르르 쏟아지지 않는다. 복잡하게 얽혀 꼬부라지는 골목들의 질긴 팔심 덕분인 것 같다. 폭 일미터도 안되게 동네 속으로 파고드는 막장 같은 모퉁이도 많은데, 하긴 저렇듯 뭐든 결국 앞이 트일 때까지 시퍼렇게 감고 올라 가는 것이 넝쿨 아니냐. 그러니까, 굵직굵직한 동아줄의 기나긴 골목들이 가파른 비탈을 비탈에다 꽉꽉 붙들어매고 있는 것이다. 잘 붙들어맺는지 또 자주 흔들어보곤 하는 것이다. 오늘도 여기 헌 시멘트 담벼락에 양쪽 어깻죽지를 벅벅 긁히는 고된 작업, 해풍의 저 근육질은 오랜 가난이 절이고 절인 마음인데, 가난도 일말 제맛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것이다. 한 노파가 지금 당신 집 쪽문 앞에다, 골목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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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저 빨간 곶시(詩)/문인수 2015. 9. 18. 21:20
친정 곳 통영 유자도에 에구구, 홀로 산다. 나는 이제 그만 떠나야하고 엄마는 오늘도 무릎 짚고 무릎 짚어 허리 버티는 독보다. 그렇게 끝끝내 삽짝까지 걸어 나온, 오랜 삽짝이다. 거기 말뚝 박히려는 듯 한번 곧게 몸 일으켰다, 다시 곧 바짝 꼬부라져 어서 가라고가라고 배 뜰 시간 다 됐다고 손 흔들고 손 흔든다. 조그만 만(灣)이 여러 구비, 새삼 여러 구비 깊이 내게 파고들어 또 돌아본 즉 곶(串)에, 저 옛집에 걸린 바다가 지금 엄청 더 많이 부푼다. 뜰엔 해당화가 참 예뻤다. 어서 가라고가라고 내 눈에서 번지는 저녁노을, 빨간 슬레이트 지붕이 섬을 다 물들인다. 유자도 : 경남 통영시 한산면 창좌리 장축은 북동-남서 방향으로 약 100m,단축은 남-북 방향으로 약 65m, 장곡마을 선착장 맞은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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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죽도시장 비린내시(詩)/문인수 2015. 9. 17. 20:26
이곳은 참 복잡하다. 시장 입구에서부터 물씬, 낯설다. 포항 죽도공동어시장 고기들은 살았거나 죽었거나 아직 싱싱하다. 붉은 고무 다라이에 들어 우왕좌왕 설치는 놈들은 활어라 부르고, 좌판 위에 차곡차곡 진열된 놈들은 생선이라 부르고…… 죽도시장엔 사람 반, 고기 반으로 붐빈다. ‘어류’와 ‘인류’가 한 데 몰려 쉴 새 없이 소란소란 바쁜데, 후각을 자극하는 이 파장이 참 좋다. 사람들도 그 누구나, 죽은 이들을 닮았으리. 아무튼 나는 죽도시장에만 오면 마음이 놓인다. 이것저것 속상할 틈도 없이 나도 금세 왁자지껄 섞인다. 여긴 비린내 아닌 시간이 없어, 그것이 참 깨끗하다 죽도시장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도동 2-4 부지면적 약 14만 8,760㎡, 점포수 약 1,200개에 달하는 포항 최대 규모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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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모량역시(詩)/문인수 2015. 8. 14. 23:35
모량역은 종일 네모반듯하다. 면소지 변두리 낯선 풍경을 가을볕 아래 만판 부어놓는다. 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개 때문에 저기서부터 시작되는 너른 들판을, 들판에 출렁대는 누런 벼농사를 더 널리 부어놓는다. 개는 비명도 없이 사라지고, 논둑길을 천천히 걸어 나오는 저 노인네는 또 누구신가. 누구든 상관없이 시꺼먼 기차 소리가 무지막지 한참 걸려 지나간다. 요란한 기차 소리보다 아가리가 훨씬 더 큰 적막을 다시 또 적적, 막막하게 부어놓는다. 전부, 똑같다. 하루에 한두 사람, 누가 떠나거나 돌아오거나 말거나 모량역은 단단하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되다. 모량역 :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내서로 1424-21 동대구~포항간 통근열차가 2008년 1월 1일부터 폐지되면서 여객 취급이 중지되었다. 중앙선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