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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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시(詩)/문인수 2021. 6. 14. 15:08
나는 오늘도 내뺀다. 나는 오랫동안 이 동네, 대구의 동부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산다. 나는 딱히 갈 곳이 없는데도, 시외버스정류장은 그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듯 수십년째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선 골목골목들까지 나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아무 데나 가보려고, 눈에 짚이는 대로 행선지를 골라 버스를 탄다. 어느날은 강릉까지 표를 샀다. 강릉 휠씬 못미처 묵호에서 내렸다. 울진 가려다가 또 변덕을 부려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영천 영해 영덕 평해 청송 후포 죽변…… 아무 데나 내렸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도 아무 데나 버려진 곳은 없어, 지금 오직 여기 사는 사람들…… 말 없는 일별, 일별, 선의의 낯선 사람들 인상이 모두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한 노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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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눈물시(詩)/문인수 2021. 3. 19. 09:12
곤충 채집할 때였다. 물잠자리, 길 앞잡이가 길을 내는 것이었다. 그 길에 취해가면 오릿길 안쪽에 내 하나 고개 하나 있다. 고개 아래 뻐꾹뻐꾹 마을이 나온다. 그렇게 어느 날 장갓마을까지 간 적 있다. 장갓마을엔 큰누님이, 날 업어 키운 큰누님 시집살이하고 있었는데 삶은 강냉이랑 실컷 얻어먹고 집에 와서 으스대며 마구 자랑했다. 전화도 없던 시절,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느그 누부야 눈에 눈물 빼러 갔더냐며 어머니한테 몽당빗자루로 맞았다. 다시는 그런 길, 그리움이 내는 길 가보지 못했다. (그림 : 이혜민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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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고모역의 낮달시(詩)/문인수 2018. 5. 16. 20:28
고모(顧母), 고모동이라는 데가 대구의 변두리에 있다. 늙으신 어머니를 돌아본다는 사연이 젖어 있다. 생전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서는, 돌아서 가다 또 돌아보는, 이별 장면을 담은 흘러간 유행가 ‘비 내리는 고모령’의 현장이다. 야트막한 고갯길이 비가 내리면 아직도 실제로 비에 젖는다. 수 십 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인 고모동 일대는 훼손되지 않은 산과 들, 금호강 강굽이가 대구의 동쪽 관문을, 인터불고호텔 같은 건물들을 그럴듯하게 꾸며 주는 유일한 배경이다. 정작 문짝 하나 새로 달 수 없는 고모동엔 무엇보다 초라한 고모역이 있다. 하지만 돌아오는 이 없는 도시 속의 오지다. 바쁘게 살아온 그대 변두리의 쓸쓸한 취락, 허공의 폐역. 어머니를 돌아보라, 헌 집에 홀로 사시다 저 낮달이 된 지 오래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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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물빛, 그것은 진실입니다시(詩)/문인수 2018. 1. 22. 00:31
물은 제 빛깔을 어디다 두는지. 물풀이며 자갈이며 고요히 노는 물고기들, 냇바닥만 새로, 아름답게 차게 비추네. 물은 얼른 제 빛깔을 감추네. 저 시퍼런 바다를 한 손아귀 훔치면 과연 시퍼런가, 다만 손바닥 손금까지 다시 읽게 하네. 물은 ‘사랑한다’는 말과 같아서 만상을 적셔 아연 생생하게 깨우네. 만상을 맛보며 자세히 들여다보는 눈, 물은 아직 제 빛깔을 말하지 않네. 하늘 아래 일망무제로 만나는 긴 수평선, 물의 영혼은 풀잎 끝에서도 맑게 내다보네. 전폭 몸을 섞는 저 장엄한 진실, 그리고 기쁨! 오백 날 물이 쌓여 이룬 일획의 깊이여 물은 비로소 망망 제 빛깔을 긋네. (그림 : 김윤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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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청라의 길시(詩)/문인수 2017. 3. 15. 15:19
흰구름 흘러가고 나는 여기에 남았네. 백합이 피기에 나도 웃으니 너 없는 날들이 시작 되었네. 그렇지만 금새 어디로 갔나싶어 푸른 담장이 넝쿨, 청라의 길을 보네. 청라언덕에 올라 길을 묻네. 새 떼가 날아가고 나는 입을 다무네. 빈나무 큰 키에 나도 서보니 너 떠난 바람에 바람 불었네 돌아보면 먼 산 대답이 숨어버려 푸른 담쟁이 넝쿨, 청라의 길을 보내 청라언덕에 올라 길을 묻네 청라언덕 : 대구 중구 달구벌대로 2029 대구시 중구 동산동에 있는 청라언덕은 박태준의 가곡 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를 뜻하는데, 박태준의 학창시절 언덕 위 선교사 사택에 뒤덮인 담쟁이 그늘에서 마주쳤던 백합화 같은 여학생을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한다. (사진 : 흙집마을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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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매화시(詩)/문인수 2017. 2. 25. 19:40
어느 처마 낮은 대폿집에 들고 싶다. 따순, 분통 같은 방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지분냄새 자욱하여 불콰히 취기가 오른다면 육자배기로, 흘러간 유행가로 질펀 흘러갔으면 좋겠다. 젓가락 장단으로 아, 뚝 뚝 꺾어낸 억수장대비의 북채 로 동백 동백 같은, 늙은 작부의 상처 또한 붉게 씹으리. 다시 한 사발, 여자의 과거사를 가득 부어 마시면 지리산, 악산 산 거칠수록 더 여러 굽이 굽이굽이 풀려서 그러나 물이 불어 시퍼렇게 자꾸 깊어가는 섬진강. 저 긴 긴 목울대 치받치며 끄윽 끅 꺾이며 흘러가는 거 보라, 역린(逆鱗) 떨며 떨리며 대숲은 섧고 또 섧다 난분분난분분 매화 뿌린다. (그림 : 송필용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