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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수 - 나는 지금 이곳이 아니다시(詩)/문인수 2021. 6. 14. 15:08
나는 오늘도 내뺀다.
나는 오랫동안 이 동네, 대구의 동부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산다.
나는 딱히 갈 곳이 없는데도, 시외버스정류장은 그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듯
수십년째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이 동네에선 골목골목들까지 나를 너무 속속들이 잘 알아서
아무 데나 가보려고,
눈에 짚이는 대로 행선지를 골라 버스를 탄다.
어느날은 강릉까지 표를 샀다. 강릉 휠씬 못미처 묵호에서 내렸다. 울진 가려다가 또 변덕을 부려
울산 방어진 가는 버스를 탄 적도 있다. 영천 영해 영덕 평해 청송 후포 죽변……
아무 데나 내렸다.
그러나 세상 그 어디에도 아무 데나 버려진 곳은 없어, 지금 오직 여기 사는 사람들……
말 없는 일별, 일별, 선의의 낯선 사람들 인상이 모두
나랑 무관해서 편하다.
한 노인이 면사무소 옆 부국철물점으로 들어가
한참을 지나도 영 나오지 않는다. 두 여자가 팔짱을 낀 채 힐끗 쳐다보며 지나갈 뿐,
나는 지금 텅 빈 비밀, 이곳에서 이곳이 아니다. 날 모르는 이런 시골,
바깥 공기가 참 좋다
(그림 : 고재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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