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인수
-
문인수 - 2월시(詩)/문인수 2017. 1. 10. 12:29
그대 생각의 푸른 도화연필 같은 저녁이여, 시린 바람의 억새 사이사이가 자디잘게 자디잘게 풀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 나무와 억새와 바위 사이가 또한 거뭇거뭇 소문처럼 번져 잘 풀리면서 산에 있는 것들 모두 저 뭇 산의 윤곽 속으로 흘러들었나, 불쑥불쑥 지금 가장 확실히 일어서는 검은 산 아래 저 들판 두루 사소한 것들의 제방 안쪽도 차츰 호수 같다 다른 기억은 잘 보이지 않는 저녁이여 세상은 이제 어디라 할 것 없이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그립다, 그립다, 눈머는구나 저렇듯 격의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이여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 아,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대여 마음이 풀리니 다만 몸이 섞일 뿐인 저녁이여 (그림 : 김성실 화백)
-
문인수 - 가을 기차시(詩)/문인수 2016. 11. 8. 09:46
들국 앉은 모습이 설핏 종지부 같다. 들국 가느다란 모가지 너머 저 빈 들 먼 끝머리 은빛 기차 한 가닥 천천히 가고 있다. 생각하면 엊그제 개나리 목련 피었다 서둘러 지고 라일락 진달래 아카시아 패랭이 분꽃 달리아 명아주꽃 장미 나팔꽃이 또 줄지어 겨우 겨우 따라왔다. 짧고 아름다웠던 보폭이여 어릴 적엔 그렇게 징검다리 건넜다. 아이들 여럿이 뒤뚱뒤뚱 건넜다. 아이들의 어린 동생들도 다 빠지지 않고 건너면 오, 꽃 자욱한 메밀밭 희고 자잘한 기쁨이 가슴에 들에 많았다. 그렇게 봄 가고 여름 간 것일까. 생각하면 엊그제 더 많이 어둡고 소란스러웠던 날들은 발목을 풀고 떠난 물소리 같은 것. 어느 날은 문득 뒤가 비어 있고 죄 없고 눈물 없는 것들만이 뼈처럼 이어져 이 큰 둘레의 가을을 건너가고 있다. 들..
-
문인수 - 땅끝시(詩)/문인수 2016. 9. 8. 00:56
끝났다. 모든 길은 또 이렇게 시작되었다. 땅끝마을 땅끝에다가 슬쩍 발끝을 갖다 대보고는 씁쓸히 웃는다. 가파른 언덕 아래 밤바다 파도 소리가 폭풍을 안고 거칠다. 지느러미, 부레가 없는 지난날의 절망 따위여 포말, 포말, 캄캄하게 에워싸며 파랑치던 야유를 기억한다. 다시 출발하자고 막 돌아섰으나 질풍노도라는 말, 혹은 말, 저놈의 갈기를 잡고 올라타 본 적 없다. 나는 한 번도 부려먹어 보지 못한 세월, 세월이 끝내 준 것이라고는 도대체 청춘뿐이다. 지금은 늙어 아무것도 자멸하지 않고 땅끝마을 왔다가 돌아가는 초행길이지만 땅끝과 발끝, 말단끼리는 서로 참 돈독한 데가 있구나 소싯적부터 오래 잘 알고 지낸 사이 같다. (그림 : 김명효 화백)
-
문인수 - 미역섬시(詩)/문인수 2016. 9. 4. 01:25
이 섬 주인이라곤 할머니 네 사람이 전부다. 목포며 여수로 떠난 이웃들이 한해 한번 미역 따라 들어왔다 나간다. 멀어져가는 배 꽁무니도 한 점, 멀어져가는 섬 곡지도 한 점, 새까맣게 뜬 섬이다. 가슴에 못대가리만하게 박히는 저 뒤끝, 마저 수평선 넘어갔다. 미역국 마시는 바다, 질펀하게 번지는 해복(解腹)이다. 얼마나 허하랴. 미역섬 :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리에 속한 섬이다. 맹골 곽도(藿島) 면적 0.17㎢, 해안선 길이 2.5㎞, 총 6가구에 7명이 살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63m이다. 갯벌이나 모래사장은 따로 없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가까운 섬은 맹골도로 2.0㎞ 떨어져 있다 1700년경에 주민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섬 주위에 미역이 많이 자라..
-
문인수 - 닻시(詩)/문인수 2016. 7. 29. 22:16
아버지는 늙어 그땐 이미 어부가 아니었다. 고기잡이 대신 고향집 뒤꼍에 한 그루 밀감나무를 가꿨다. 주렁주렁 달린 밀감 가을에도 따지 않고 아버지, 나무 째 거적을 둘러 두루 감싸두었다. 남쪽 바닷가, 겨울이면 나는 또 차를 돌려 친정엘 갔다. 아버지, 여기 저기 거적을 들춰, 그 품 뒤적거려 골라 딴 싱싱한 밀감, 밀감 한 자루씩 끙, 실어주곤 했다. 원항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등대 꼭대기까지 날 번쩍 안아 올리곤 했다. 뭐라! 뭐라! 거친 수염을 내 이마에, 양 볼에 마구 문질렀다. 비리고 짠 해초냄새가 내 작은 몸에 물씬 차올라, 나는 참 얼마나 멀리 반짝였는지… 나는 그 먼 바다의 털, 만파도 무성한 파도소리에 흠뻑 파묻히며 문득 문득 자랐다. 나는 여섯 살, 일곱 살, 여덟 살…, 열아홉 살이 되..
-
문인수 - 동행시(詩)/문인수 2016. 7. 25. 11:19
그의 지친 모습은 처음 본다. 챙 아래 가린 것처럼 어두운 저 이마가 원천일까. 자꾸 배어나와 번지는 어떤 그늘이 젊은 이목구비와 체격까지 모두 소리 없이 감싸고 있다. 얼굴에, 어깻죽지에 발린 그의 마음인데 그 표정이 지금은 잠시도 그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그래, 불한당 같은 망발의 빡빡한 일정 탓으로 목 위 머리가 너무 무거운 것 같다. 그는 무리해서 일부러 내게 들렀다. 배려에 대해 나는 코미디든 개그든 이 가을 채소처럼 한 광주리 너풀너풀 담아 안겨주고 싶지만 시간이 이십여 분밖에 없어 내 쪽에서 그만 어둑어둑 물들고 만다. 그는 막차로 떠났다. 밤 열시 사십분 발, 버스에 오를 때 좌석에 앉을 때 내게 손 흔들어줄 때 그를 밀어 주는, 내려놓는, 한번 웃는 등 미색 롱코트를 걸친 저 기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