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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생각의 푸른 도화연필 같은 저녁이여,
시린 바람의 억새 사이사이가
자디잘게 자디잘게 풀린다
나무와 나무 사이
나무와 억새와 바위 사이가 또한 거뭇거뭇
소문처럼 번져 잘 풀리면서
산에 있는 것들 모두
저 뭇 산의 윤곽 속으로 흘러들었나,
불쑥불쑥 지금 가장 확실히 일어서는 검은 산 아래
저 들판 두루 사소한 것들의 제방 안쪽도 차츰 호수 같다
다른 기억은 잘 보이지 않는 저녁이여
세상은 이제 어디라 할 것 없이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고
그립다, 그립다, 눈머는구나
저렇듯 격의없이 끌어다 덮는 저녁이여
산과 산 사이, 산과 마을 들판 사이
아, 천지간
말이 없었다 그대여
마음이 풀리니 다만 몸이 섞일 뿐인 저녁이여
(그림 : 김성실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