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권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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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즐거운 합석시(詩)/권선희 2014. 2. 21. 22:12
어수룩 저무는 저녁 주머니 깊숙이 손 찌르고 건들건들 휘파람 불며 무명이네 집 갑니다 유리문 열고 수족관 텅텅 치며 아따 그놈들 싱싱하다 목청부터 세우면요 너부죽이 엎드려 연속극 보던 무명엄마 화들짝 놀라 매무새 만집니다 평상에 올라 앉아 보이러 틀면 이내 달아오르는 궁디 우럭이며 도다리가 싱싱하게 흔드는 창 너머엔 어느새 눈발이 치고 난전을 접고 집으로 돌아가는 좁은 어깨에 나리는 눈부신 비늘 이쯤이면 온답니다 신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파도소리 아이고, 이 사람아 우예 여기꺼정 왔노 언 손 당겨잡고 소주 한 잔 맑게 부어주는 구룡포, 밤새 철벅거리며 곁에 앉아 흘러간 세월 잘도 불러 젖힌답니다 (그림 : 신종식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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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배웅시(詩)/권선희 2014. 2. 21. 22:10
보내고 돌아올 즈음엔 자망선 옆구리에 매달려 끼걱거리는 타이어 잠든 집어등 간격과 눈더미처럼 쌓인 그물에서 냄새가 난다 종일 노닐던 바람은 바다로 돌아가지만 불빛 고슬고슬 익어가는 골목의 창들은 제 살붙이를 기다리며 흔들리고 하나씩 배웅할 때마다 둥둥 밀려가는 포구 고래를 끌어올리던 판장도 물살을 방류하고 달빛 헛헛 바라보는데 무화과나무가 끙끙 자식을 낳는 담 밑에서 술찌기 초하며 자전거도 쓰러지는데 머물다 떠난 자리는 언제나 비리고 아픈 향기가 난다 (그림 : 신종식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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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마지막 말씀시(詩)/권선희 2014. 2. 21. 22:09
고랫배 손놓은 지 스무해다 놓고 싶아 놓았겠나 놓으라니 놓았재 우리사 심이 있나 천치들 맨키로 하라믄 하고 말라믄 마는 기재 저 시커무리한 바다 디비며 고래만 좇아 댕기던 놈이 맨땅에서 무신 할일로 있겠노 마 밥만 묵고 똥만 싸는 기재 고래 지는 또 을매나 심심캤노 쫓아오고 달라빼고 그기 사는 맛 아니겠나 와 새램도 글찮나 지지고 뽁고 아옹다옹 살아야 맛이 나재. 고래도 비스무리한 기 버글버글 하믄 재미 탱가리가 있겠나 말이다 죽자 살자 도망또 치고 니 주고 내 살자꼬 쌈질도 하고 그래야재 내 나이 하마 여든 우에 넷이나 더 얹었다 죽기 전에 다부 고랫배 띄울 날 있겠나 문디 지랄맞은 법이라카는 기 사램 맘 고래 맘을 알기나 아나 (그림 : 김규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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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매월여인숙시(詩)/권선희 2014. 1. 22. 21:39
나 오늘 기필코 저 슬픈 추억의 페이지로 스밀라네 눈 감은 채 푸르고 깊은 바다 흉어기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목단꽃 붉은 이불을 덮고 왕표연탄 활활 타오르는 새벽이 올 때까지 은빛다방 김양을 뜨겁게 품을라네 작은 창 가득 하얗게 성에가 끼면 웃풍 가장 즐거운 갈피에 맨살 끼우고 내가 낚은 커다란 물고기와 투둘투둘 비늘 털며 긴 밤을 보낼라네 한 사내의 고기잡이는 잠시 그물을 거두어야 했다. ‘흉어기’이므로…. 하지만 사내는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슬픈 추억의 페이지’를 뒤적이고 있다. 홍등이 켜진 골목길 어귀일 것이 분명한 여인숙에서 그는 ‘목단꽃 붉은 이불’과 ‘왕표 연탄’이 대변하는 피곤에 절어 있지만 ‘은빛 다방 김양’이 있으므로 한시름 놓는다. 밤은 길지만 아랑곳 하지 않을 터이다. 밤새 그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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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담쟁이시(詩)/권선희 2014. 1. 22. 21:38
새끼고 뭐시고 소용없는 나이가 되면 저 즐거운 공장으로 갈 거다 욕심 훨훨 풀어주고 펭귄공장으로 갈 거다 흰 가운에 위생모 쓰고 비린 생선 삶고 찌며 유쾌한 패설들 속으로 들어가 보고 쿡쿡 옆구리 찔러가며 그 여편네 흉도 볼 거다 오래된 벽으로 담쟁이 걸어가는 점심시간 깔깔깔 웃음소리 겹벚꽃으로 피고 바람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가끔은 반장에게 삿대질하며 고래고래 항의도 하고 여럿이 작당하여 작업거부도 할 거다 월급 타면 돼지목살 한 근 사서 묵은 김치에 들들 볶아 목청 좋은 여편네들과 소주도 한 잔 할 거다 저녁이 길고 아침은 멀리에서 더디게 와도 비린내 밴 작업복 야무지게 빨아 입고 마지막 행운번호 꼭 붙들고 살 거다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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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꽃에 대하여시(詩)/권선희 2014. 1. 22. 21:35
칠칠에 사십 구 여자 나이 마흔 아홉이믄 말이요 길바닥에 내뻔져놔도 아무도 안 줍어 갈 나인기라요 팔팔에 육십 사 남자 나이 예순 넷캉 같은 기지요 무신소리 하노 내 아는 찬모는 올개 예순 셋인데 애인이 예순 다섯인기라 그란데 마 이틀만 연애로 안하믄 온몸띠에 좀이 쑤시고 열이 화득화득 난다카드라 아고 그기 구신들이재 사램잉교 뭐시 볼끼 있겠능교 택또 읎는 소리 마소 이보게 동상 삭신이 옥신옥신 한다카믄 하마 오십이요 새북에 비실비실 한다카믄 그기 육십 줄 넘는기고 마눌이 불쌍해지믄 그기 칠십인기라 니가 우예 세월이라카는 기를 알겠노 행님요 벌레벌레 하믄 다 꽃잉교 말씨 솜씨 맴씨 쫀득쫀득하니 찰떡맨키로 찰기가 있어야 그기 꽃이지요 아고 이 답답은 자슥아 세월이 다 데불고 가는 거로 안즉도 모리나 개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