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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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노천카페의 시간시(詩)/문정희 2023. 10. 13. 07:05
허물린 돌 더미 같은 저녁 시간 낯선 노천카페에 내가 앉아 있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벗었지만 미처 벗지 못한 두려움이 함께 앉아있다 모르는 사람이 곁으로 온다 그는 가만히 내 곁으로 오더니 선채로 자연스럽게 능숙하게 자기 손에 든 컵에다 새로 주문한 내 아이스커피를 따라 부었다 그리고 유유히 저쪽으로 사라졌다 노숙 차림이 바람 한 점 펄럭이지 않는다 저녁이 내려오는 노천카페의 시간 그것이 무엇이든 알아도 몰라도 좋다 새로 막 주문한 빈 컵을 앞에 놓고 낯선 노천카페에 내가 앉아 있다 (그림 : 송지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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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추석달을 보며시(詩)/문정희 2022. 9. 14. 16:56
그대 안에는 아무래도 옛날 우리 어머니가 장독대에 떠놓았던 정한수 속의 그 맑은 신이 살고 있나 보다 지난 여름 모진 홍수와 지난 봄의 온갖 가시덤불 속에서도 솔 향내 푸르게 배인 송편으로 떠올랐구나 사발마다 가득히 채운 향기 손바닥이 닳도록 빌고 또 빌던 말씀 참으로 옥양목같이 희고 맑은 우리들의 살결로 살아났구나. 모든 산맥이 조용히 힘줄을 세우는 오늘은 한가윗날 헤어져 그리운 얼굴들 곁으로 가을처럼 곱게 다가서고 싶다 가혹한 짐승의 소리로 녹슨 양철처럼 구겨 버린 북쪽의 달, 남쪽의 달 이제는 제발 크고 둥근 하나로 띄워 놓고 나의 추석달은 백동전같이 눈부신 이마를 번쩍이며 밤 깊도록 그리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 (그림 : 심만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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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사랑보험시(詩)/문정희 2018. 9. 7. 22:58
남산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순간에 내 차를 들이받고 공포에 떨고 있는 퀵서비스를 그냥 보내 주었듯이 그렇게 너를 보내 줄 수는 없을까 몰라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 전조등을 갈아 끼우고 부러진 등뼈를 펴고 내상을 수리할 수는 없을까 몰라 ) --> 물방울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바다에서 솟아올라 심장 깊숙이 돌진해 온 돌고래를 바다로 고스란히 돌려보낼 수는 없을까 몰라 ) --> 휘청하니 생명을 뒤흔든 접촉 사고 꽃송이처럼 생생한 바큇자국들 얼마나 긴 시간을 으깨어야 지울 수 있을까 몰라 어느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어야 할까 몰라 (그림 : 김소정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