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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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율포의 기억시(詩)/문정희 2014. 8. 24. 08:12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밭 때문이었다 뻘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림 : 한봉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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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약속시(詩)/문정희 2014. 2. 13. 11:22
그대 사랑하는 동안 부탁한 말은 하나뿐이다 처음 잔을 부딪쳐 별을 떨구며 약속한 말도 오직 하나뿐이다 "뒷 모습을 보이지 말기로 하자" 희미한 가로등 아래 몸부림치며 눈이 내릴 때 밑뿌리 들린 겨울나무처럼 어쩌면, 메마른 갯벌에 나뒹구는 한 줌 바람처럼 뒷모습은 슬프고 쓸쓸하였다 사랑은 끝이 있음을 이미 알지만 어느 날, 너와 나 뒷모습을 보이지 말기로 하자 그대 눈동자 속을 흐르는 천년의 수심 속으로 잎이 지듯 노을이 지듯 그냥 그렇게 지기로 하자 (그림 : 정인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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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술시(詩)/문정희 2014. 1. 24. 10:34
술이 나를 찾아오지 않아 오늘은 내가 그를 찾아간다 술 한번 텄다 하면 석 달 열흘 세상 곡기 다 끊어버리고 술만 마시다가 검불처럼 떠나가버린 아버지의 딸 오늘은 술병 속에 살고 있는 광마를 타고 악마의 노래를 훔치러 간다 그러나 네가 내 가슴에 부은 것은 술이 아니라 불이었던가 벌써 나는 활 활 활화산이다 사방에 까맣게 탄 화산재를 보아라 죽어 넘어진 새와 나무들 사이로 몸서리치며 나는 질주한다 어디를 둘러봐도 혼자뿐인 날 절벽 앞에 술잔을 놓고 나는 악마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댄다 으흐흐! 세상이 이토록 쉬울 줄이야 (그림 : 원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