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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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신록시(詩)/문정희 2017. 3. 5. 13:28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솔개처럼 푸드득 날고만 싶은 눈부신 신록, 예기치 못한 이 모습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지난 겨울 깊이 박힌 얼음 위태로운 그리움의 싹이 돋아 울고만 싶던 봄날도 지나 살아 있는 목숨에 이렇듯 푸른 노래가 실릴 줄이야 좁은 어깨를 맞대고 선 간판들 수수께끼처럼 꿰어다니는 물고기 같은 차들도 따스한 피 돌아 눈물겨워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참고 기다린 것밖엔 나는 한 일이 없다 아니, 지난 가을 갈잎 되어 스스로 떠난 것밖엔 없다 떠나는 일 기다리는 일도 힘이 되는가 박하 향내 온통 풍기며 세상에 눈부신 신록이 왔다 (그림 : 남진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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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밤(栗)이야기시(詩)/문정희 2016. 10. 1. 13:31
내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먼 분이셨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실에 매단 밤 따먹기에 나가 알밤은 키 큰 아이들이 모두 따가고 쭉정이 밤 한 톨 겨우 주워온 나를 이것 봐라, 알밤 주워왔다! 고 외치던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깊숙이 먼 분이셨다 어머니의 노래는 그 이후에도 30년도 더 넘게 계속되었다 마지막 숨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쭉정이 밤 한 톨 남의 발밑에서 겨우 주워오는 내 손목 치켜세우며 이것 봐라, 내 새끼 알밤 주워왔다! 고 사방에 대고 자랑하셨다 (그림 : 정지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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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찬밥시(詩)/문정희 2016. 5. 19. 16:12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디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을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그림 : 남진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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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한계령을 위한 연가시(詩)/문정희 2015. 12. 4. 12:48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년 만의 폭설을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젊은 심장을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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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가을 편지시(詩)/문정희 2015. 8. 29. 20:48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 다한 말 못 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 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그림 : 서정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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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 오십 세시(詩)/문정희 2015. 8. 13. 20:59
나이 오십은 콩떡이다 말랑하고 구수하고 정겹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화려한 뷔페상 위의 콩떡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내가 콩떡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죄는 아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엉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하여간 텅 빈 이 평야에 이제 무슨 씨를 뿌릴 것인가 진종일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슬슬 피해 가는 이것은 나이가 아니라 초가을이다 잘하면 곁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어 가장 완벽한 나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지만 꽃병에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반쯤 상처 입은 꽃 몇 송이 꽂혀 있다 두려울 건 없지만 쓸쓸한 배경이다 (그림 : 최은숙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