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정희
-
문정희 -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시(詩)/문정희 2015. 7. 16. 11:17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숨죽여 홀로 운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못 볼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지금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을 말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그림 : 최정길 화백)
-
문정희 - 부부시(詩)/문정희 2015. 5. 21. 17:04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
-
문정희 - 남편시(詩)/문정희 2015. 5. 21. 16:52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어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그림 : 홍문규 화백)
-
문정희 - 파꽃길시(詩)/문정희 2015. 5. 21. 12:13
흰 파꽃이 피는 여름이 되면 바닷가 명교리에 가보리라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 냄새를 따라가면 이 세상 끝에 닿는다는 명교리에 가서 내 이름 부르는 바다를 만나리라 어린시절 오줌을 싸서 소금 받으러 가다 넘어진 바위 내 수치와 슬픔 위에 은빛 소금을 뿌리던 외가 식구들 이제는 모두 돌아가고 없지만 서걱이는 모래톱 속에 손을 넣으면 차거운 눈물샘은 여전히 솟으리니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 끝을 건드리는 파꽃 냄새를 따라가서 그리운 키를 쓰고 소금을 받으리라 넘실대는 여름바다에 푸른 추억의 날개를 달아주리라 명교리 :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명교리 (그림 : 김대섭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