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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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겨울 둥지시(詩)/김왕노 2022. 12. 21. 07:54
공장에서 돌아온 동생의 옷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종일 기계를 닦고 조여도 늘 헐거워지고 녹슬어가는 동생의 꿈을 위해 겨울이라 손에 쩍쩍 달라붙는 몽키와 스패너로 오늘도 얼마나 이 악물고 닦고 조였을까. 편서풍이 아닌 바람이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면서 퇴근하는 길에 갑자기 분 바람에 자전거 핸들이 꺾여 공장대로에 내동댕이쳐질 뻔했다면서 안도하는 동생의 말에도 기름 냄새가 났다. 일자리가 없어 야근도 줄어 살 길 막막하다는 말에도 났다. 피곤을 푸는 것은 잠이 제일이라며 서둘러 불을 끈 자취집의 하늘로 늦은 철새가 날고 잠들어도 동생의 몸에서 피어나는 기름 냄새는 겨울에도 지지않는 증오의 이파리 이파리였다. 자취방을 가득 채우고 밤새 서걱대는 증오의 이파리였다 (그림 : 김영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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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블랙로즈를 찾아가는 밤시(詩)/김왕노 2020. 6. 26. 15:18
블랙로즈는 지하의 술집 나자리노에 있을까. 한 때 작은 사롱의 얼굴 마담이, 차가운 얼굴의 블랙로즈, 떠나온 고향 이야기 할 때만은 오누이처럼 다정다감했던 블랙로즈, 장미였으나 가시가 없었던 블랙로즈, 검은 호흡을 끝없이 하던 블랙로즈 철 지난 줄 모르고 늦게 핀 꽃처럼 블랙로즈는 어디서 끝물의 들꽃처럼 시들고 있는지, 한 잔의 술을 따 르면서도 정성을 다해 제 생을 살짝 기울여 따라주던 여자. 술에 꽃잎이 흠뻑 젖었어도 사리분별이 뚜렷 했던 블랙로즈, 해저물면 날 기다린다던 블랙로즈 블랙로즈를 찾아가는 저녁, 블랙로즈에게로 데려가려고 어두운 골목에서 나타나는 삐끼가 그리운 밤, 담 위의 하얀 박꽃과 어우러진 달빛이 그리워지는데 숨죽인 국경 같은 마을을 지나 블랙로즈를 찾아 나선 밤, 블랙로즈를 찾아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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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11 월에는 꽃 걸음으로 오시라시(詩)/김왕노 2019. 11. 9. 13:59
꽃의 노란 발자국 소리가 눈부시다. 서릿발 선 맨 땅을 밟으며 잔물결이 한 곳으로 모이듯 아직도 걸어서 오는 소국의 무수한 발소리, 발소리 맞지 않는 일조량 속에서 끓어오르기만 한 청춘의 가슴을 식혀 모두가 꽃 피어 영광이라며 잔을 높이 들 때도 꽃 기척 없이 떫고 작은 자잘한 얼굴로 가을 모퉁이를 지나 뇌관을 일제히 터뜨린 듯이 소국이 연쇄반응으로 피어나 꽃 걸음으로 오는 아침 찬물소리로 귀와 눈을 맑게 씻어낸 채 소국이 따라온 길을 밟아 꽃구경 오시라. 꽃 걸음으로 가을 가장 깊은 곳, 곧 겨울과 맞닥뜨릴 지점으로 네 귀한 걸음걸이로 와서 꽃을 즐기시라. 꽃 하나 핀다는 것이 그저 피는 것이 아니라 별빛이 오래 초점을 맞춰 불씨가 피어나듯 피어나는 것이라. 꽃 한번 피어 불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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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물새는 그리운 쪽으로 운다시(詩)/김왕노 2019. 10. 4. 15:05
장미가 수없이 피어도 그리운 쪽으로 피어난다. 배가 망망대해를 떠돌아도 그리운 쪽으로 떠돈다. 별빛도 그리운 쪽으로 휘며 밤새 쏟아진다. 그리운 쪽에는 누군가 꼭 있을 것만 같아 꽃잎을 따면서 온다. 안 온다 온다. 안 온다. 꽃 점을 치며 울먹이고 있을 것 같으므로 가지 않는 기별 기다리며 그리움에 옷자락 젖어 밤새 나부끼며 있을 것 같으므로 저 강가 물새 온몸으로 강물을 보고 울 것 같으나 물새는 그리운 쪽으로 운다. 강 건너 먼 곳을 향해 운다. (그림 : 이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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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너를 부르려고 온 세상시(詩)/김왕노 2019. 5. 30. 19:32
처음엔 자유를 불러봤다. 자유가 오지 않았다. 청춘을 불렀다. 청춘은 왔으나 시원찮았다. 꽃을 불렀다. 꽃은 부르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는 것이었다. 하늘을 불렀으나 하늘은 쳐다보는 것, 은하수, 낮달, 별, 구름, 비행기는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바다는 찾아가는 것, 강물은 멀리서 훔쳐보는 것, 사랑은 부르지도 찾아가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기다리는 것, 그리움은 수천 수만 그루 심어 놓고 그리움이 바람에 물결 칠 때 함께 물결치는 것, 민주는 꿈으로만 있는 것, 그러면 너는 뭐냐. 너는 내가 불러야 할 사람, 너를 부르려고 이 한 번의 세상에 왔다. 너를 부르려고 온 세상이다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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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너를 꽃이라 부르고 열흘을 울었다시(詩)/김왕노 2019. 4. 19. 16:12
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화무십일홍이란 말 앞에서 울었다. 너를 그 무엇이라 부르면 그 무엇이 된다기에 너를 꽃이라 불렀다. 십장생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중에 학이거나 사슴으로 불러야 했는데 나 화무십일홍이란 말을 몰라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나 십장생을 몰라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단명의 꽃으로 불렀기에 내 단명할 사랑을 예감해 울었다. 사랑이라면 가볍더라도 구름 정도로 오래 흘러가야 했는데 세상에나 겨우 십 일이라니 십 일 동안 꽃일 너를 사랑해야 하다니 그 십 일을 위해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너는 내게 와 꽃이 되었나니 꽃에 취하다 보니 꽃그늘을 보지 못했나니 너를 꽃이라 부르고 핏빛 꽃잎 같은 입술로 울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