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왕노
-
김왕노 - 다비식시(詩)/김왕노 2016. 7. 31. 22:40
불 들어갑니다. 나오세요. 누가 이렇게 외치며 이 세상 밖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 삶도 하나의 다비식, 목숨을 태우는 일 불 들어갑니다. 나오세요. 누가 이렇게 외치며 내 생의 변두리에서 울부짖는 것 같아 오늘도 뜨거웠던 하루 분의 목숨은 타서 어둠이 되고 내 안에서 사리같이 여물어 단단한 것은 그리움 몇과 사랑도 하나의 다비식, 목숨을 태우는 일 불 들어갑니다. 제발 나오세요. 불 들어갑니다. 제발 나오세요. 누가 저 어두운 거리에서 부르고 있는 것 같아 자꾸 불러도 사랑 외에 목숨을 태워야 할 일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사랑이 탄 흔적 위에 남겨진 영롱한 눈물 몇 과 (그림 : 이형준 화백)
-
김왕노 - 너를 지나치다시(詩)/김왕노 2016. 7. 31. 22:25
안개 같은 너를 지나쳤다 눈물 같은 너를 지나쳤다 물푸레나무 같은 너를 지나쳤다 내가 한눈 판 거지 눈에 콩까풀 씐 거지 굴뚝새 같은 너를 지나쳤다 은하수 같은 너를 지나쳤다 냇물 같은 너를 지나쳤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며 지나쳤다 네 몸 속으로 난 수많은 꽃길을 가면서 지나쳤다 시도 때도 없이 지나쳤다 내 마른 날을 꽃비로 적시던 너를 지나쳤다 미쳤던 거지 내가 미쳤던 거지 풀밭에 달개비 꽃으로 피어나던 명아주로 서 있던 너를 다소곳이 울음으로 서 있던 너를 너를 지나쳐 저물 녁까지 걸어왔다 끝없이 끝없이 와 버렸다 (그림 : 김도영 화백)
-
김왕노 -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시(詩)/김왕노 2016. 7. 11. 12:18
한때 물방울이던 당신, 풀꽃에 맺히던 한 방울 당신, 이슬이던 당신,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도 톡 터지려던 물방울 당신, 먼지만 닿아도 터지려던 당신,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눈물방울보다 더 작은 당신,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하던 당신, 내가 물방울이면 쉽게 엉겨붙어버릴 거라던 당신, 창문을 열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마르면서 휘날리는 하얀 빨래를 보며 아직도 그리움을 하고 계시나요. 철거덕거리는 기차바퀴 소리가 잠을 잘게 쓸고 가면 가만히 일어나 아직도 먼 먼 그리움을 하십니까. 나를 닮은 물방울 하나 낳고 싶다던 당신, 가임을 기다리며 물방울로 반짝였던 당신, 속이 투명했던 당신, 물방울과 맺혀 있으면 찾지 못할 당신, 밤새 추적추적 비 내리면 내가 그리워 눈물방울과 운다는 ..
-
김왕노 - 천개의 강을 건너는 법시(詩)/김왕노 2015. 11. 18. 18:21
천개의 강중 마지막 강가에는 세상을 헤매고 온 네가 강둑에 풀꽃처럼 피어나 있어야 한다. 나를 기다린다고 바람 안을 기웃거리면서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마음으로 올올이 그리움을 짜면 나 허겁지겁 천 개의 강을 건너서 너에게 가지 않으랴. 수심이 깊은 강에는 목숨을 띄워서라도 가지 않으랴 천개의 강중 마지막 강가에 네가 있다면 이미 마음은 먼저 너에게 떠나고 몸이 물결 위에 몸을 실으리라 물결이 출렁거릴 때마다 어느 강가에 물망초 피어나고 밥 짓는 연기가 유혹해도 나의 발길은 멈추지 않으리라 천개의 강을 건너는 법에는 반드시 마지막 강가에는 네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 벌써 그 마지막 강가에 네가 이르렀는지 내 몸이 저 아득한 곳을 향해 끝없이 휘어지고 있다. (그림 : 이영희 화백)
-
김왕노 - 굽시(詩)/김왕노 2015. 9. 11. 10:08
뒤돌아보면 지나온 발자국마다 풀꽃이 하나 둘 피어나고 있다. 양말을 벗어보면 긴 여행의 흔적은 물집으로 잡혀있다. 자꾸 달아오르는 사막 같은 이 도시를 지나 또 어디를 꿈꾸며 가야 하나 내 지나며 남긴 발자국마다 풀씨를 뿌리며 따라오는 남루한 이름 하나 꿈결인 듯 자꾸 보이는데 여기서 멈춰서 기다려 줄 순 없다. 별자리도 바뀌고 내 굽의 각질이 되어준 아버지의 말씀이 다 닳기 전 헛걸음질 할지라도 꿈꾸는 곳으로 이 밤 가야 한다. 더 먼 길을 가려 물집을 터뜨리면 코를 후려갈기는 풀꽃 향기보다 더 진한 내 삶의 이 비린 냄새 (그림 : 박락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