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왕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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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야크로의 명상시(詩)/김왕노 2015. 2. 24. 16:28
내가 잠든 밤 설산고도를 야크인 아버지가 지나고 있다. 야크의 울음은 꿈의 발원지, 울음 울 때마다 푸른 꿈이 흘러내리지만 지금은 만년 눈발을 등짐으로 지고 포근한 명상에 잠겨야 할 야크가 질긴 무릎으로 소금덩이 지고 천 길 낭떠러지 위를 몇 천 년 전에도 갔듯 아슬아슬 가고 있는 밤이다. 모두가 잠들어 이룬 잠의 산맥위로 불면의 야크인 아버지가 가고 있다. 간 맞지 않는 밥상 미네랄 결핍의 어린 짐승의 혓바닥을 찾아 지혜의 눈으로 희박해지는 푸른 세월을 견디며 가고 있다. 때로는 등짐을 영원히 내려버리려는 야크가 스스로 아득한 낭떠러지로 헛발 디뎌버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설산고도보다 더 새파랗게 깎아지른 정신으로 간다. 나는 남을 위해 널찍한 등으로 그 무엇 하나 진적 없고 이 강한 무릎으로 선 뜻 힘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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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중년의 편지 1시(詩)/김왕노 2015. 1. 22. 18:50
우울한 샹송이 흐르는 창가에서 중년의 편지를 쓴다. 한 때는 용서하지 못하겠다며 분노를 보냈던 사람에게 너를 용서하지 않는 동안 내가 세상으로 받은 용서에 대해 쓴다. 나로 인해 눈물에 젖던 사람에게 쓴다. 우울한 샹송이 흐르는 찻집에서 리필 가는 종업원의 나직한 발소리 들려오는데 다시 청춘이 리필 되지 않는 가슴으로 중년의 편지를 쓴다. 편지 행간에 가을이 오고 이름 하나 질듯이 가물거리고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마저 눈발로 산간 지방으로 몰려가 펄펄 내리고 우울한 샹송이 흐르는 오후의 창가에 앉아 중년의 편지를 쓴다. 내가 한때 뜨겁게 부둥켜안았던 시도 내가 한 때 잔 가득 부어 마시던 한 사람의 목소리도 잠깐 나를 취하게 했을 뿐 결국은 나를 떠나가는 빗방울이었다. 우울한 샹송이 흐르듯 세월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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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과적시(詩)/김왕노 2015. 1. 22. 18:42
어디다 내 짐을 내릴 수 있는가. 한 때 열정으로 너무 많은 꿈을 실었다. 내 몫이 아닌 것마저 챙겨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는 것이 고통이다. 내 것이 많을수록 행복의 지수는 낮아지고 고통에 일그러지는 모순의 길에 들어섰다. 어디서 나의 긴 고통의 여정은 끝나고 내 달아오른 굽을 맑은 물에 담그고 갈증을 없앨 수 있는가. 내 목적지로 삼을 오아시스는 어디서 물 냄새 풍기며 푸르러지는가. 내 영혼의 곳간이 가득 채워지는 것이 내 영혼이 무거워져 꼼짝 달싹 못하는 과적의 길인지 몰랐다. 한 발 앞으로 간다는 것이 고통의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딘가에 내 짐을 내릴 수 있다는 희망 때문, 스스로 등 짐 지웠으나 스스로 내릴 수 없는 혹이 되었다. 가면 갈수록 난 완고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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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없는 사랑에 대한 에스프리시(詩)/김왕노 2015. 1. 22. 18:30
오늘도 새파란 하늘 아래 풀만 눈부셨습니다. 만나지 못할 것을 압니다. 그래도 세월은 가겠지만 세월이 가도 만나지 못할 것을 압니다. 만나지 못하는 날에도 꽃은 즐겁고 새의 부리는 노래하며 기쁨에 물들어 노랗습니다. 오늘도 나는 없는 사랑을 기다립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터진 그리움을 한 뜸 한 뜸 깁습니다.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는 없는 사랑을 내 사랑이라 나직이 불러봅니다. 에스프리esprit(명사) : 정신 또는 기지(機智)라는 뜻으로, 근대적인 새로운 정신 활동을 이르는 말. 특히 문학에서는 자유분방한 정신 작용을 이른다. (그림 : 이상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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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술을 배웠습니다.시(詩)/김왕노 2015. 1. 22. 18:27
저녁이면 짐승 되어 나를 뛰쳐나가 그대에게 가는 나를 말리려다 차라리 고삐를 매었습니다. 밤새 고삐를 낚아채고 울부짖으며 네게 가려는 나로 인해 한잔 두잔 술을 배웠습니다. 보다보다 못해 별도 눈물 어리는 밤입니다. 고삐를 너무 심하게 조였나 내가 너무 심하였나 근심하다 한잔 두잔 술이 늘었습니다. 잔마다 넘치는 술이, 술이 아니라 그리움이라는 것을 뼈에 깊게 새기는 밤들이었습니다. 나를 뛰쳐나가 네게 가려는 나를 말리다 말리다가 죽음보다 독한 술을 배웠습니다 (그림 : 이홍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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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마음 한 칸 내어주는 저녁의 수소문시(詩)/김왕노 2015. 1. 22. 18:21
이 저물어 가는 시간 누추한 몸 비집고 들어갈 마음 한 칸 어디 있나 장물을 취급하듯 가져간 슬픔 은밀히 받아주고 뒷문이라도 열어 나를 불러들이는 그런 마음 한 칸 한 때 강물이 휘감아 흐르는 소읍지에서 그런 마음 한 칸에 세 들어 살 번도 했고 달맞이꽃 피는 그 항구에서 몽마르뜨 언덕 아래서도 어쩌면 난 열린 마음 한 칸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는지도 모른다 밤 깊어도 열려있는 그 마음에서, 그 마음의 뒤란에서 우는 소쩍새 울음으로부터도 개밥바라기 벌써 마중 오는 저물어 가는 시간 그리운 마음 한 칸 오늘은 어느 곳에서 열려있나. (그림 : 이상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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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넌 천년 동안 만나온 그 사람인 줄 모른다.시(詩)/김왕노 2015. 1. 22. 18:14
낯이 익다. 뒤돌아서간 너는, 너의 뒤태마저 가리려는 듯 물안개는 피어나고 혹 우리 언제 만났던 가 따지지 않아도 넌 생시의 골목이 아니더라도 내 꿈속에 드나들며 천년 동안 만나온 사람 같아 백년 솔밭에 달빛 흐르면 우리는 우리의 작은 죄 하나 부끄러워 달맞이 꽃 그늘에 숨어 참회로 울던 우리 그렇게 하여 우리의 마음 청정지역이어서 십장생이 살고 천년 학이 와서 춤추며 놀다가 갔을 터 아무리 보아도 낯이 익다. 잠깐 마주보다가 멀어진 너는 너를 싣고 떠나는 계절의 바퀴소리 철거덕거리며 귓가에 남았는데 철거덕 소리 사이사이마다 칸나 꽃 붉고 새는 우는데 파도는 높고 갈매기 만선을 노래하는데 낯이 익다. 넌 내가 천년 동안 만나온 슬픈 사랑의 그 사람인 줄 모른다. (그림 : 정종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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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버들치시(詩)/김왕노 2015. 1. 22. 12:06
나는 네 말이 내게 왔다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 한 두레박 우물물이었다가 개울물로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줄 알았다. 구름이 되었다가 지리멸렬하는 줄 알았다. 한 시절 억새로 나부끼다가 가는 줄 알았다. 네 말이 여름 철새로 멀리 이동하는 줄 알았다. 미루나무 노란 단풍잎이었다가 지는 줄 알았다. 나는 네 말이 그렇게 떠나는 줄 알았다. 물이끼 푸른 징검다리 아래서 개울을 건널 내 콩콩 발소리 기다리는 버들치인 줄 몰랐다. 그리움을 물풀처럼 물고 사는 버들친 줄 몰랐다. 작은 지느러미 파닥이며 사는 버들치인 줄 몰랐다. (그림 : 정수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