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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노 - 야크로의 명상시(詩)/김왕노 2015. 2. 24. 16:28
내가 잠든 밤 설산고도를 야크인 아버지가 지나고 있다.
야크의 울음은 꿈의 발원지, 울음 울 때마다 푸른 꿈이 흘러내리지만
지금은 만년 눈발을 등짐으로 지고 포근한 명상에 잠겨야 할 야크가
질긴 무릎으로 소금덩이 지고 천 길 낭떠러지 위를
몇 천 년 전에도 갔듯 아슬아슬 가고 있는 밤이다.
모두가 잠들어 이룬 잠의 산맥위로 불면의 야크인 아버지가 가고 있다.
간 맞지 않는 밥상 미네랄 결핍의 어린 짐승의 혓바닥을 찾아
지혜의 눈으로 희박해지는 푸른 세월을 견디며 가고 있다.
때로는 등짐을 영원히 내려버리려는 야크가
스스로 아득한 낭떠러지로 헛발 디뎌버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설산고도보다 더 새파랗게 깎아지른 정신으로 간다.
나는 남을 위해 널찍한 등으로 그 무엇 하나 진적 없고
이 강한 무릎으로 선 뜻 힘겨워하는 사람의 짐을 들어준 적 없는데
마른 풀 몇 줌을 씹어 삼킨 야크가 어떤 호의호식도 바라지 않는 야크가
순도 높은 꿈의 암연을 지고 산산이 부서지는 별빛을 맞으며
우주의 모서리를 스쳐서 설산고도를 지나고 있다.
모든 것을 달관한 것 같은 야크의 얼굴, 믿음이 가는 야크의 얼굴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 우리가 오래 바라보아야 할 아버지의 얼굴
누가 재촉하거나 채찍으로 위협하거나 쫓아오거나 하지 않는 데도
야크는 성실한 보폭으로 설산고도를 가고 있다.
희망의 대물림인 그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고 있다.
먼 씨족의 마을 동치미 그릇에 아버지 이름이 살얼음처럼 둥둥 뜨는데
한 알 소금이 한 망울 희망으로 맺히는 곳으로 꿈의 전령으로 가고 있다.
아버지의 목숨 칼날 같은 설산고도위에 아슬아슬 얹어놓고 가고 있다.
나는 나만의 길을 지금껏 걸어왔는데 자칫 누군가에 밀려 길을 벗어나면
증오하고 통곡하며 퍼질러 앉아 누가 손 내밀어 주기를 기다렸는데
지금 우리의 곤한 잠 위로 그 무엇에도 무릎 꿇지 않는 야크가
누가 쌍수를 흔들며 멀리서 마중 나오는 것도 아닌데 가고 있다.
야크의 길이야 설산고도 양지바른 풀밭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 길 접어두고
소금 짐 지는 길이 아버지 길이라며 만년설 위에 발자국 꾹꾹 새기며
오랫동안 길에 중독된 듯 설산고도를 가고 있다.
아버지의 길이란 위대한 길인데도 우쭐대지 않으면서 야크로 가고 있다.
때로는 야크의 몸속으로 소금 같은 차디찬 만년설이 내리는데 가고 있다.
내가 닮고 싶은 야크가, 천년 고집처럼 저기 가고 있다.
(그림 : 조광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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