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곽재구
-
곽재구 - 화해시(詩)/곽재구 2017. 2. 17. 11:34
다시 소꿉놀이를 할 수 있다면 어머니가 되고 싶다 양지바른 돌각담 밥티꽃 그늘 아래 인간의 풋것들이 사랑놀이를 하고 있다 깨진 백자조각 위 잘 자란 보릿잎 툭툭 튀는 봄 햇살 가지런히 썰어놓고 꼬막껍질 속 흙밥 대신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도 담아놓고 추수하고 빵을 굽고 등을 켜고 사랑을 깁는 인간의 풋것들의 어머니가 되고 싶다 마흔 넘고 쉰 넘어 빼앗을 것 빼앗고도 다 못 뺏은 인간의 쌍것들이 어느 봄 빼앗긴 자의 모습으로 밥티꽃 그늘 아래 돌아와 떨고 섰을 때 설익은 보리꽃 꼬막 들밥에 어쩌면 생각날지도 모를 제 네살 적 사랑놀이 가슴의 풀들로 돌아와 흔들릴 수 있도록. (그림 : 이청기 화백)
-
곽재구 - 선암사 은목서 향기를 노래함시(詩)/곽재구 2016. 6. 24. 23:15
내 마음이 가는 그곳은 당신에게도 절대 비밀이에요 아름다움을 찾아 먼 여행 떠나겠다는 첫 고백만을 생각하고 당신이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때 나는 조용히 웃을 거예요 알지 못해요 당신은 아직 내가 첫여름의 개울에 발을 담그고 첨벙첨벙 물방울과 함께 웃고 있을 때에도 감물 먹인 가을옷 한 벌뿐으로 눈 쌓인 산언덕 넘어갈 때도 당신은 내 마음의 갈 곳을 알지 못해요 그래요 당신에게 내 마음은 끝내 비밀이에요 흘러가버린 물살만큼이나 금세 눈 속에 묻힌 발자국만큼이나 흔적 없이 지나가는 내 마음은 그냥 당신은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은목서(銀木犀) : 중국 원산이며 잎은 마주나고 긴 타원형 또는 타원상 넓은 바소꼴로 되어 있으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거나 밋밋하다. 잎의 길이 7∼12cm, 폭 2.5∼4cm..
-
곽재구 - 봄시(詩)/곽재구 2016. 4. 21. 18:54
다시 그리움이 일어 봄바람이 새 꽃가지를 흔들 것이다 흙바람이 일어 가슴의 큰 슬픔도 꽃잎처럼 바람에 묻힐 것이다 진달래 꽃편지 무더기 써갈긴 산언덕 너머 잊혀진 누군가의 돌무덤가에도 이슬 맺힌 들메꽃 한 송이 피어날 것이다 웃통을 드러낸 아낙들이 강물에 머리를 감고 5월이면 머리에 꽂을 한 송이의 창포꽃을 생각할 것이다 강물 새에 섧게 드러난 징검다리를 밟고 언젠가 돌아온다던 임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보리꽃이 만발하고 마실 가는 가시내들의 젖가슴이 부풀어 이 땅위에 그리움의 단내가 물결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곁을 떠나가주렴 절망이여 징검다리 선들선들 밟고 오는 봄바람 속에 오늘은 잊혀진 봄 슬픔 되살아난다 바지게 가득 떨어진 꽃잎 지고 쉬엄쉬엄 돌무덤을 넘는 봄 (그림 : 백중기 화백)
-
곽재구 - 백야도에서시(詩)/곽재구 2016. 3. 28. 19:59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실비 속으로 연안 여객선이 뱃고동과 함께 들어오고 붉은 꽃망울 속에 주막집 아낙이 방금 빚은 따뜻한 손두부를 내오네 낭도섬에서 빚었다는 막걸리맛은 융숭해라 파김치에 두부를 말아 한입 넘기는 동안 붉은 꽃망울 안에서 아낙의 남정네가 대꼬챙이에 생선의 배를 나란히 꿰는 걸 보네 운명의 과녁을 뚫고 지나가는 불화살 늙고 못생긴 후박나무 도마 위에 놓인 검은 무쇠칼이 무심하게 수평선을 바라보는 동안 턱수염 희끗희끗한 사내가 추녀 아래 생선꿰미를 내걸고 있네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물새 깃털 날리는 작은 여객선 터미널에서 계요등꽃 핀 섬과 섬으로 연안 여객선의 노래는 흐르고 대꼬챙이에 일렬로 꿰인 바다 핏기 말라붙은 어족의 눈망울 속 초승달이 하얗..
-
곽재구 - 도라지꽃시(詩)/곽재구 2014. 9. 16. 14:00
대청마루 위 할머니와 손녀 감자 세알이 화안하다 기둥에는 두해 전 세상 떠난 할아버지의 붓글씨가 누렇게 바래 붙어 있는데 산산수수무설진(山山水水無說盡)이라 쓰인 문자의 뜻을 아는 이는 이 집에 없다 할머니가 감자 껍질을 벗겨 소금 두알을 붙인 뒤 손녀의 입에 넣어주는 모습을 마당귀 도라지꽃들이 보고 있다 도라지꽃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할머니가 시집온 그날도 그 자리에 머물러 꽃등을 흔들었다 도라지꽃에서는 구들장 위 한데 모여 잠을 자는 식구들의 꿈 냄새가 난다 눈보라가 날리고 얼어붙은 물이 쩡쩡 장독을 깨뜨리는 무서운 겨울밤을 할머니는 아가야라고 부른다 도라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대청 위 할머니도 손녀도 감자를 담던 사기그릇도 보이지 않는다 주련의 글귀도 사라지고 먼지가 뿌연 마루 위를 도라지꽃들..
-
곽재구 - 낮달시(詩)/곽재구 2014. 8. 9. 23:31
송광사 뒷산 계곡 장안(長安) 마을 김복순 할머니가 토란국을 끓일 때는 마당 앞 돌각담 가에서 사십 년 넘게 자라는 들깨를 가루 내어 한 주먹 푹 국솥에 넣어 끓이지요 그 토란국을 자실 때에 이빨 다 빠진 할머니는 입술로 오물오물 국물을 들이켜는데 일찍 뜬 낮달 하나가 처마 밑 제비집 근처까지 내려와서 할머니 쉬었다 자시지요 된장 속에 묻은 무장아찌랑 들깻잎이랑 다 맛 들었구 말구요 꼭 그렇게 말참견을 하지요 그럴 때 할머니는 오냐 내 새끼 효자다 오냐 내 새끼 효자다 국그릇 들고 마루 끝에 서서 하염없이 북녘 하늘 보지요 살아서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아들 생각 젖지요. (그림 : 노명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