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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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바람이 좋은 저녁시(詩)/곽재구 2013. 12. 14. 13:31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라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깔깔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그림 : 김복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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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희망을 위하여시(詩)/곽재구 2013. 12. 14. 13:29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도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울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걸어오는 한 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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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그리운 폭우시(詩)/곽재구 2013. 12. 14. 13:28
어젠 참 많은 비가 왔습니다 강물이 불어 강폭이 두 배로 더 넓어졌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금세라도 줄이 끊길 듯 흔들렸지요 그런데도 난 나룻배에 올라탔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흙탕물 속으로 달렸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빠트린 게 있습니다 내 나룻배의 뱃머리는 지금 온통 칡꽃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종일 꽃장식을 했답니다 날이 새면 내 낡은 나룻배는 어딘가에 닿아 있겠지요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의 지름길은 얼마나 멀고 또 험한지........ 사랑하는 이여. 어느 하상(河上)엔가 칡꽃으로 뒤덮인 한 나룻배가 얹혀 있거든 한 그리움의 폭우가 이 지상 어딘가에 있었노라 가만히 눈감아줘요.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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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기다림시(詩)/곽재구 2013. 12. 14. 13:26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 만큼 부벼댑니다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그림 : 정수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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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가거도 편지시(詩)/곽재구 2013. 12. 14. 13:26
한 바다가 있었네 햇살은 한없이 맑고 투명하여 천길 바다의 속살을 드리우고 달디단 바람 삼백예순 날 불어 나무들의 춤은 더없이 포근했네 그 바다 한가운데 삶이 그리운 사람들 모여 살았네 더러는 후박나무 숲그늘 새 순금빛 새 울음소리를 엮기도 하고 더러는 먼 바다에 나가 멸치잡이 노래로 한세상 시름을 달래기도 하다가 밤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 한 몸 되어 눈부신 바다의 아이를 낳았네 수평선 멀리 반짝이는 네온사인 불빛 같은 건 몰라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골프장 주인이 되고 누가 벤츠 자동차를 타고 그런 신기루 같은 이야기는 정녕 몰라 지아비는 지어미의 물질 휘파람소리에 가슴이 더워지고 지어미는 지아비의 고기그물 끌어올리는 튼튼한 근육을 일곱물 달빛 하나하나에 새길 수 있다네 길 떠난 세상의 새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