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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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겨울의 춤시(詩)/곽재구 2013. 12. 14. 13:23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텐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 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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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천 일이 지나면시(詩)/곽재구 2013. 12. 14. 13:23
오늘 내가 한 편의 시를 쓰고 내일 두 편 모레 세 편 쓴다면 천 일 후엔 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때 나는 말하리라 이 아름다운 땅에 태어나 시간이 흐른다고 써야 할 시들을 쓰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시간이 흐른다고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잖겠는가 써야 할 시들은 많은데 바람들은 맑은 햇살을 뿌리며 응달의 강기슭을 돌아가는데 울먹인 가슴 녹이며 이제는 고요하게 지켜보아야 할 두려움 모를 그리움만 들판 가득 쌓였는데 천 일이 지나면 혹시 몰라 이 아름다운 나라에 태어나 내가 하루 천 편의 시를 쓰지 못해 쓰러질 때 그때 말 못할 그리움은 밀려와서 내 대신 쓰지 못한 그리움의 시들 가을바람으로나 흔들려 내 사랑하는 사람들 귓속에 불어넣어주고 있을지. (그림 : 윤종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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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첫눈 오는 날시(詩)/곽재구 2013. 12. 14. 13:21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 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서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긴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 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그림 : 한순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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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사평역(沙平驛)에서시(詩)/곽재구 2013. 12. 11. 16:38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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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그리움시(詩)/곽재구 2013. 12. 10. 11:30
이른 새벽.. 강으로 나가는 내 발걸음에는 아직도 달콤한 잠의 향기가 묻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나는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바람 중 눈빛 초롱하고 허리통 굵은 몇 올을 끌어다 눈에 생채기가 날만큼 부벼댑니다 . 지난밤,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강둑에 매인 채 출렁이고 작은 물새 두 마리가 해 뜨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갑니다 . 사랑하는 이여 설령 당신이 이 나루터를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 기다림은 끝나지 않습니다. 설레이는 물살처럼 내 마음 설레이고 또 설레입니다 (그림 : 신재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