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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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구두 한 켤레의 시시(詩)/곽재구 2014. 6. 6. 12:50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쑬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 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 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점 꾸려주지 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그림 :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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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우이도 편지시(詩)/곽재구 2013. 12. 27. 22:03
어무니 가을이 왔는디요 뒤란 치자꽃초롱 흔드는 바람 실할텐디요 바다에는 젖새우들 찔룩찔룩 뛰놀기 시작했구먼요 낼 모레면 추석인디요 그물코에 수북한 달빛 환장하게 고와서요 헛심 쪼개 못 쓰고 고만 바다에 빠졌구만요 허리 구부러진 젖새우들 동무 삼아 여섯 물 달빛 속 개구락지헤엄 치는디 오메 이렇게 좋은 세상 있다는 거 첨 알았구만요 어무니 시방도 면소 순사 자전거 앞에 서면 소금쟁이 걸음처럼 가슴이 폴짝 뛰는가요 출장 나온 수협 아재 붙들고 아직도 공판장 벽보판에 내 사진 붙었냐고 해으름까지 우는가요 어무니 추석이 낼 모렌디요 숯막골 다랑치논 산두빛 익어 고울텐디요 호박잎 싼 뜨신 밥 한 그릇 차마 그리운디요 언젠가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 일뿐으로 가막소에 가고 지명수배를 받던 세상 부끄러워할 날 올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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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단오(端午)시(詩)/곽재구 2013. 12. 14. 13:37
사랑하는 이여 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룻배가 사공도 없이 저 혼자 아침 햇살을 맞는 곳 지난밤 가장 아름다운 별들이 눈동자를 빛내던 신비한 여울목을 찾아 헤매었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곳으로 와요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 햇창포 꽃잎을 풀고 매화향 깊게 스민 촘촘한 참빛으로 당신의 머리칼을 소복소복 빗겨드리겠어요 그런 다음 노란 원추리꽃 한 송이를 당신의 검은 머리칼 사이에 꽂아드리지요 사랑하는 이여 강가로 나와요 작은 나룻배가 은빛 물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곳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를 감겨드리겠어요 그곳에서 당신의 머리칼을 빗겨드리겠어요 (그림 : 구병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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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새벽 편지시(詩)/곽재구 2013. 12. 14. 13:35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의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림 : 최정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