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재구 - 도라지꽃시(詩)/곽재구 2014. 9. 16. 14:00
대청마루 위
할머니와 손녀
감자 세알이 화안하다
기둥에는 두해 전 세상 떠난
할아버지의 붓글씨가 누렇게 바래 붙어 있는데
산산수수무설진(山山水水無說盡)이라 쓰인
문자의 뜻을 아는 이는 이 집에 없다
할머니가 감자 껍질을 벗겨
소금 두알을 붙인 뒤
손녀의 입에 넣어주는 모습을
마당귀 도라지꽃들이 보고 있다
도라지꽃은 깊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할머니가 시집온 그날도 그 자리에 머물러 꽃등을 흔들었다
도라지꽃에서는 구들장 위 한데 모여 잠을 자는 식구들의 꿈 냄새가 난다
눈보라가 날리고 얼어붙은 물이 쩡쩡 장독을 깨뜨리는 무서운 겨울밤을
할머니는 아가야라고 부른다
도라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대청 위 할머니도 손녀도 감자를 담던 사기그릇도 보이지 않는다
주련의 글귀도 사라지고
먼지가 뿌연 마루 위를
도라지꽃들이 바라보고 있다
(그림 : 이남순 화백)
'시(詩) > 곽재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곽재구 - 백야도에서 (0) 2016.03.28 곽재구 - 봄길 (0) 2015.04.09 곽재구 - 낮달 (0) 2014.08.09 곽재구 - 구두 한 켤레의 시 (0) 2014.06.06 곽재구 - 얼음 풀린 봄 강물 (섬진마을에서) (0) 2014.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