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전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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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능내역시(詩)/전영관 2018. 3. 21. 22:04
햇살은 문을 열 줄 몰라 창으로 들어온다 열차 시간에 늦어 의자에 주저앉았다 계절이 바뀌어도 집 한 번 들리지 않는 탕아 자세로 화물열차가 제 성질에 못 이겨 지나친다 노인네들이 흘리고 간 중얼거림이 탄력 없이 늘어져 의자에서 흘러내린다 대낮인데 어쩌라고 홀딱새는 울어대는지 낮이 길어 저녁 먹고도 샛길을 한참이나 걸어야 땅거미가 강을 건너오는데 홀딱새가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운다 손님 없는 칼국숫집 여자의 귓불을 훑어댄다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으슥한 곳을 아는데 둘이 앉으면 오목하니 맞춤인 자리도 있는데 데리고 갈 사내가 없다 기차는 남은 봄을 태워 떠나고 역사 마당엔 이른 여름만 들끓는다 지나던 바람이 배롱나무의 가려운 허리를 긁어준다 토란밭이 있던 자리, 머위가 솜털을 고르며 땡볕을 견디던 공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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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야근시(詩)/전영관 2018. 3. 21. 21:07
저녁은 저 혼자 팥죽 같은 노을 한 그릇 퍼먹고 퇴근했다 몇몇은 불판 앞에 모여 상사를 씹고 삼겹살을 씹고 질긴 하루를 씹는다 호떡 장사 아줌마는 모로 누워 식어가는 호떡 자세로 기대앉았다 폐지 할머니는 맹수의 아가리 같은 빙판 골목을 어떻게 지나갔을까 늙는다는 건 세상이 자신과 반대 방향으로 달음박질하는 기분 비명을 지르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 복권집 사내는 복이 빗나간 얼굴로 담배를 피운다 주름과 연기가 구분할 수 없는 무늬로 어룽거린다 골목에 들어찬 어둠은 촘촘하게 얼어 있다 양손으로 한 웅큼 쥐고 무릎에 눌러 분지르면 정시에 퇴근한 자들의 뒷모습이 우지끈, 쏟아질 것 같은 심야다 (그림 : 김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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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지방대학시(詩)/전영관 2018. 3. 21. 20:50
우리 오늘 강릉 간다 아내 잔소리는 접착력이 좋아서 속옷 가방에 날마다 갈아입으라는 표정으로 붙어 있고 책들에게 잠 좀 줄이라며 눈을 흘긴다 동네 골목에서나 발씨 익은 신발에게 기숙사 계단서 뛰지 말라고 다짐을 받는다 내 걱정은 군내 난다고 치워버렸는지 먼 길 가기에 무겁다고 내려놨는지 가방이고 보퉁이고 보이지 않는다 짐짓 태연한 척 나는 담배 들고 발코니만 들랑거린다 우리 식구 오늘 강릉 간다 주말마다 꼭 올 거라는 약속인지 배웅하러 들어온 봄볕은 챙겨 넣지 않는 막내 성적대로 줄 세우면 강릉쯤이 제 자리라 생각했는지 시르죽어 집안을 둘러보는 막내 너 좋아하는 짜장면 먹고 출발하자면서 내시선은 막내의 지린내 시절까지 주섬주섬하느라 황망한 아내의 종종걸음만 따라다닌다 시르죽어(동사) : 기운을 못 차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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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바람떡시(詩)/전영관 2018. 3. 21. 20:30
익명의 고을에서 먹었더라도 이 맛은 나를 알아볼 것이네 아궁이에 얼쩡거리다가 망근해진 손돌바람과 앞섶에 고여 있던 당신 탄식이 갈마들어 두고 온 냄새로 늙었을 것이네 도무지, 모른 척 할 수 없네 팥꼬투리는 인대 끊어진 당신 새끼손가락 같아서 내 투레질 소리와 함께 여물던 알갱이가 책씻이 날 달음질하듯 쏟아졌을 것이네 나는 목욕탕에 쪼그려 징징거리고 당신을 때꼽재기 벗겨주며 박꽃이 되던 마당에 가을볕도 한 양푼 집집마다 공짜로 들여놓고 살았네 나란히 살진 초승달들 헤아려 보네 당신의 빈손으로 반죽한 것이야 아니겠지만 하나가 일 년치라 셈해주고 싶은 살진 초승달들을 혼자 삼키네 당신의 하늘은 나도 없고 달도 없어 캄캄할 것이네 남은 쑥은 함지에 웅크린 채 바람이 차가워진다고 버석거릴 것이네 달 없는 동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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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월림부락 대밭집시(詩)/전영관 2018. 3. 21. 20:25
빈집이 폐가가 되기까지 마당의 살구꽃 송아리는 몇 번이나 펼쳐졌는지 몰라 누렁이는 빈 여물통을 뒤집고 외양간 기둥을 들이박아 새벽을 재촉하던 집 삼남 삼녀 여섯 멍울들 딸들 수다에 댓돌 모서리도 둥글게 닳아버리고 아들들은 불퉁스레 소가지나 부리던 집 아들들 코밑 검어 대처로 가고 딸들도 허벅지 굵은 사내 따라 살림을 내고 누렁이는 발굽짐승이라고 떼거리로 생매장당한 집 두 노인네 점심거리 싸 들고 밭으로 가면 빈집인지 폐가인지 구분도 못 할 터인데 바람이 자발없이 바지랑대 빨래까지 떨어트려 놓던 집 몸은 낡아 돌쩌귀 뻐개진 정지문처럼 삐걱거리는데 마음은 더디 늙어서 읍내 갈 때 바르던 명자꽃 색깔 립스틱만큼이나 더디 늙어서 저만치 떠밀린 몸을 따라가느라 잠도 오지 않았을 텐데 바깥 노인네는 영영 돌아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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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곡우(穀雨)시(詩)/전영관 2018. 3. 21. 20:15
걸음마다 다섯 조각으로 깨진 종들이 밟히네 월산리 젖은 소리가 바닥으로 스미어 질척거리네 온다더니 아니 오고 매정하게 가는 품이더니 머뭇거리고 매양 길이 엇갈려 해토머리에는 망울이더니 잡은 날이 끝물이네 올벚나무 파장이네 달 낳는 산이나 보고 가려네 월산리 그믐으로 이울어도 툭 떨어지는 꽃잎은 아니라서 날카로워도 마음을 베이지 않는 초승이라서 꽃보다 달이라네 차라리 달이라네 화피(樺皮)로 목을 친친 감을까 내리닫는 계곡물 허리를 매어놓을까 올벚나무들 봄을 앓느라 해쓱하네 없는 집 맏딸처럼 버짐 핀 얼굴이네 저 능선 꽃 보러 왔다가 달 보고 우묵해지는 월산리 아주 툭 떨어져버리는 꽃보다 달이어서 깨트리고 돌아섰던 이맘 때 봄마다 잊은 듯 다시 찾네 비에 젖은 월산리 곡우(穀雨) : 24절기의 여섯 번째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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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약속도 없이시(詩)/전영관 2016. 9. 28. 01:14
하룻밤 물에 불린대도 멥쌀로는 허기를 채우지 못할 거 같아 찰밥을 해드려야 안심인 사람 하나 있다 수수꽃다리가 햇볕에 달여져 조청만큼이나 달달하니 찬 없는 두레상에 초대해도 결례는 아니겠다 어스름 무렴에야 찹쌀 뼈가 다 무르면 만월과 겸상으로 올려드리련다 비린 것 한 토막을 앞으로 밀어놓고 잔가시 없는 등 쪽으로 떼어드리련다 숭늉 권하는 동안도 꽃은 피고 봄은 뜸들고 여름을 당겨올 것처럼 눈빛이 짙어지겠다 창밖으로 만발한 이팝나무 숭어리가 보인다 바람으로 씻고 늦은 안개에 불려 헛밥이나 짓는다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봄을 다잡아 보려 찰밥이라 고집부리는 것이다 내 것인지 네 것인지 모르게 뒤엉겨 어쩔 수 없으니 주저앉자고 생떼라도 써볼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림 : 강지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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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느릅나무 양복점시(詩)/전영관 2016. 9. 24. 11:41
물에 불려도 다림질해도 불거진 무릎은 제 모습을 찾지 못한다 책상에 문드러진 팔꿈치도 매끈함을 잃었다 펴지지 않는 어깨는 누가 두드려주나 봄에 적어놨던 산철쭉 주소와 기러기 울음을 채록한 악보를 주머니에 넣었는데 밑이 터져 버렸다 좋은 날 쓰려고 아껴두었던 함박웃음 몇 조각도 간 곳 없다 안색을 거들어주던 깃은 주저앉았고 단춧구멍은 채워도 삐걱거릴 만큼 헐겁다 아버지가 달아주신 채로 오십 년을 지나쳤으니 수시로 기워주시던 어머니도 팔순을 넘겼으니 알아서 새로이 장만할 때가 된 거다 느릅나무 그늘에 한나절 기다렸다가 맞춤으로 그림자 한 벌 챙겨 입고 돌아갈 참이다 (그림 : 하삼두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