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전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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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파랑주의보시(詩)/전영관 2016. 9. 21. 09:11
묵호항 어판장 지붕이나 두드릴까 죽변항 가서 포장마차 천막 들추고 난바다 이야기나 출렁거릴까 바람은 뭍으로 돌아가야 할 길을 엎어버린다 바람과 파도의 가계도 위에서는 나도 당신도 허약한 승객이라서 도동항 어느 방에 보퉁이처럼 무릎 맞대고 식은 칼국수 같은 오후나 달거락거린다 낡은 이불을 몇 번 더 덮어야 할지 소용없는 가늠이나 한다 바람과 파도처럼 남남이었다가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 되기까지 누구를 흔들고 하냥 기다리게 했는지 서로 시선을 섞으면서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되짚어 보느라 조용조용 황망한 오후 (그림 : 이경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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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비오는 날이면 그 간이역에 가고 싶다시(詩)/전영관 2015. 11. 25. 18:07
비오는 날이면 마지막 열차를 타고 그 간이역에 가고 싶다. 젖은 몸으로 하늘 향해 나란히 누워 손짓하는 침목(枕木)과 침목들 지금은 기억에서 멀어진 그 간이역까지 함께 떠나고 싶은 코스모스의 행렬을 데리고 차창 밖 어둠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떠나고 싶다. 하루에 몇 차례씩 긴 하품처럼 기적이 울리면 배웅해 주는 사람, 마중 나온 사람 없는 대합실 썰물처럼 어쩌다 한 두 사람 문을 밀치고 나가면 대합실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 달려 들어오던 빗소리 지금쯤 열차는 어느 역을 떠나 가쁜 숨을 내쉬며 달려오고 있을까? 잊는다는 것은 마지막 목례도 없이 헤어진 그 사람의 이름까지도 모두 잊어야 정말 잊어지는 것이라고, 이별한다는 것은 뒷모습을 돌아 보지 않아야 정말 이별하는 것이라고 대합실에 어둠이 내리면 추억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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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오전리 구씨아저씨시(詩)/전영관 2015. 11. 25. 18:00
쇠스랑 발 구부러지도록 파고 또 파도 자갈뿐인 마르고 마른 세월 똥오줌 수없이 퍼날렀던 굳은 살 어깨너머 빈 쭉정이 눈발처럼 흩날리네. 걷어 올린 힘줄 돋은 장단지에 거머리 붙듯 찰싹 달라붙은 5남매 생각 오전리 둑길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가네. 터놓은 물꼬 따라 갈라진 논배미 물 스미듯 꽁보리밥 한 그릇 물 말아 뚝딱 넘기고 송쟁이산 종일 오르내리며 낫으로 치고 베어도 한 지게 채우지 못하는 품삯 무게만큼 하늘은 무성한 넝쿨 이파리에 가려져 녹내장 앓듯 해마다 좁아지고 숲 그늘에 앉아 담배 한 대에 되살아나는 사주팔자 엉덩이 한 손으로 툭툭 털고 기지개 한 번에 두 주먹 하늘에 내지르고 일어나 원뫼 큰누님댁 마당에 40여 년 세월도 함께 부려놓으면 진달래꽃 몇 송이 나뭇단 속에서 부끄러운 듯 베시시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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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바람난 달시(詩)/전영관 2015. 11. 25. 17:51
채 여미지 못한 치맛자락 나풀거리며 마을 앞 징검다리 따라 건너오다가 이장 집 안마당 우물가 세숫대야에 얼굴 씻고 구름 뒤에 숨어 화장을 고치는 바람난 달 삽살개가 어둔 하늘에 놀라 고개를 바짝 세우고 짖어대자 뒤란 마당에 나뭇잎 몇 잎 떨어져 내린다. 대낮 같이 휘황한 도시에선 아무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아 흔적 없이 떠 있을 뿐이지만 어둠이 낯익은 시골엔 바람난 건 달 뿐만이 아니다 별들이 먼저 나온 저녁이면 뒷동산에 오르는 동네 큰 애기 앞가슴 속에 숨어 있다가 성큼 지붕 위에 올라 앉아 두근두근 가슴을 쓰다듬는 박덩이가 되었다 하얀 달무리 머플러 얼굴을 두르고 오늘 밤은 어느 가슴에 가득 바람을 넣어 밖으로 불러낼 것인가. 달도 바람 들면 텃밭 무처럼 거뭇거뭇한 가슴 되고 달을 바라보다 바람 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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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얼큰한 시월시(詩)/전영관 2015. 11. 25. 17:41
작년에 나, 뺨 맞았잖아 장성댐이 깊기는 깊더구만 가을이 통째로 빠졌는데 흔적 없고 조각구름만 떠다니더군 백양사 뒷산 정도야 그 남색 스란치마에 감기면 깜박 넘어가지 않겠어 뛰어들까 싶기도 한데 집사람 얼굴이 덜컥 뒷덜미를 채더군 피라미 갈겨니 메기까지 푹푹 고아 수제비도 구름같이 떠오르는 어죽(魚粥) 한 사발 했지 반주로 농탁(農濁) 몇 대접 걸쳤다가 휘청 단풍에 취한 낭만파처럼 평상에 누웠던 거 아닌가 목침 베고 한 잠 늘어진 뒤 화장실에 가보니 아 글쎄 벌건 뺨에 손자국 선명한 거라 애기과부 손바닥 같은 단풍잎 대고 누워 잠시 딴살림 차렸던 거라 뭣에 쫓기기는 한 듯 뒷골 얼얼하니 내려오는 내내 흙길도 출렁거리더군 오늘 나, 거기로 뺨 맞으러 간다 혼자 쓸 한나절쯤 배낭에 챙겨 넣고 지팡이 들고 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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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불혹의 집시(詩)/전영관 2014. 11. 9. 00:55
늦도록 야근이라도 했을까 두런두런 손 씻는 버드나무 야윈 팔 사이로 고단한 새벽만 우련하다 해쓱하게 마른버짐 핀 얼굴로 산은 종아리까지 발 담근 채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갈대들의 연두 빛 걸음걸이를 헤아리는 중인데 청태 자욱한 자갈밭에 드문드문 헤집어 놓은 자리들 뽀얗다 지느러미 뭉툭해지도록 거친 바닥을 밤 새 뒤척인 흔적이리니 세월이 잔잔하게 무두질한 강물도 속내는 그렇지 않아 우락부락 높낮이가 있고 마름과 줄풀의 허름한 자리도 예정되어 있으리니 철 이른 연밭 무진무진 찾아든 열사흘 달빛이 물안개와 결 곱게 버무려지면서 불혹의 집을 세운다 유혹 아닌 것 없고 흔들리지 아니한 순간도 없더라만 봄이면 구멍 숭숭한 연근 속으로 환한 꽃빛이 들어차고 미물들도 알자리를 저리 뽀얗게 마련하는 것과 같이 물푸레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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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매조서정(梅鳥抒情) 후기시(詩)/전영관 2014. 9. 21. 11:10
물소리도 얼어붙는 섣달 당신 없는 마당엔 적요만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습니다 호롱을 밝혀도 어둠은 십년 묵은 장(醬)보다 진해서 먹을 갈아낼 필요도 없습니다 사모의 정은 강진까지 한달음에 당도하는 까닭에 백지를 펼쳐 놓고도 눈밭을 헤매는 듯 막막한 운필을 짐작은 하시는지요 밥 짓는 연기에 얹어놓은 수심이 고샅을 맴돌다가 허공으로 흩어지다가 끝내는 가라앉아 희미해지는 저녁에 매화에 앉은 한 쌍 멧새를 마주합니다 딸자식 혼수에 함께 보내라는 글귀를 여겨보고도 마재 강가에 나란히 앉아있던 우리 내외 모습은 아닌지 열없는 욕심을 내기도 했답니다 당신의 필체나마 안복(眼福)으로 받지 못하고 눈물 먼저 떨굽니다 병약한 아녀자 걸음으로는 달포 남짓 헤아릴 강진이라 합니다만 삼경에 하르르 다녀가실 수 있을 날개는 접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