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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영관 - 매조서정(梅鳥抒情) 후기
    시(詩)/전영관 2014. 9. 21. 11:10

     

     

    물소리도 얼어붙는 섣달

    당신 없는 마당엔 적요만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습니다

    호롱을 밝혀도 어둠은 십년 묵은 장(醬)보다 진해서

    먹을 갈아낼 필요도 없습니다

    사모의 정은 강진까지 한달음에 당도하는 까닭에 백지를 펼쳐 놓고도

    눈밭을 헤매는 듯 막막한 운필을 짐작은 하시는지요

    밥 짓는 연기에 얹어놓은 수심이 고샅을 맴돌다가 허공으로 흩어지다가

    끝내는 가라앉아 희미해지는 저녁에

     

    매화에 앉은 한 쌍 멧새를 마주합니다

    딸자식 혼수에 함께 보내라는 글귀를 여겨보고도

    마재 강가에 나란히 앉아있던 우리 내외 모습은 아닌지

    열없는 욕심을 내기도 했답니다 당신의 필체나마

    안복(眼福)으로 받지 못하고 눈물 먼저 떨굽니다

    병약한 아녀자 걸음으로는 달포 남짓 헤아릴 강진이라 합니다만

    삼경에 하르르 다녀가실 수 있을 날개는 접은 채로

    고개만 마현 쪽을 바라보게 그리신 까닭을

    능히 헤아리는 이 심사가 외려 한탄스럽습니다

    거친 찬에 수척해지셨을 안색만큼 퇴색한 치마일지라도

    화색 완연한 매화에 한 가닥 희망을 더해봅니다

    답신은 운도 떼지 못했는데 강진만 들물 높이로 그리움이 밀려오고

    창밖 먹빛은 어느새 희미해지는 이 새벽에

     

    얼음장 우는 소리 들립니다 회벽 같은 가슴에

    병색을 덧칠하며 지나갑니다

    십년 세월 조석으로 앞자리가 빈 겸상을 받다보니 시틋한 끼니도

    타고난 사주인양 익숙해졌답니다

    미물들도 당신 없어 기울어진 가세를 짐작하는지

    지난 가을엔 쑥부쟁이도 고개를 외로 튼 것만 보이고

    해거리도 아닌 감나무가 결실이 줄었습니다

    강변 아낙의 탄식이라도 십년 세월이면 구중궁궐 높은 담을 넘었을 터인데

    강진의 봄은 기약조차 없다 하시니

    신혼의 매화라도 잊지 말고 간직하란 의중으로 새기며

    희부연 햇살 번지는 매조도를 다시 봅니다 처마 고드름이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매조서정(梅鳥抒情) : 정약용은 부인이 보낸 다홍치마로 하피첩(霞帔帖)을 만들어 보냈으며

    시집가는 딸에게는 매조도를 전했으니 후세에 매조서정이라 칭했다

    (그림 : 송필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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