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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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부엌 문을 열고 어머니가 내다보던 마당을시(詩)/이준관 2015. 4. 12. 18:21
부엌 문을 열고 어머니가 내다보던 마당을 나는 기억합니다. 제 꼬리를 쫓아 빙빙 돌던 새끼고양이의 방울소리를. 향긋한 소똥 냄새가 풍기던 저녁. 바지가 저녘 별빛에 젖어 돌아오던 날들을, 돌아오며 혼자 중얼거리던 그 많은 외로움의 말들을 기억합니다. 사람을 닮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던 마당가, 콩깍지가 터지기를 재촉하던 후끈한 땅 열기(熱氣)를. 낮은 울타리에 걸터앉아 먼 산을 바라보던 마지막 태양. 하늘을 날아가던 아이들의 돌멩이, 그 돌멩이에 짐짓 놀란 날갯짓을 하며 서쪽으로 흩어지던 새떼들. 무엇이 즐거운지 항상 허리가 휘어지게 까르르 잘 웃던 처녀들, 그 웃음소리에 감나무 가지가 휘어져 마당에 닿던 날들을 나는 기억합니다. (그림 : 이원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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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비시(詩)/이준관 2015. 2. 15. 16:33
어렸을 때는 내 머리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비를 맞으면 해바라기 꽃처럼 쭉쭉 자랄 것 같았다 사랑을 할 때는 우산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둘이 우산을 받고 가면 우산 위에서 귓속말로 소곤소곤거리는 빗소리의 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집을 가졌을 때는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비가 좋았다 이제 더 젖지 않아도 될 나의 생 전망 좋은 방처럼 지붕 아래 방이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딸과 함께 꽃씨를 심은 꽃밭에 내리는 비가 좋다 잠이 든 딸이 꽃씨처럼 자꾸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는 일이 행복하다 (그림 : 윤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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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가을 떡갈나무 숲시(詩)/이준관 2014. 9. 24. 22:45
떡갈나무 숲을 걷는다. 떡갈나무잎은 떨어져 너구리나 오소리의 따뜻한 털이 되었다. 아니면, 쐐기집이거나, 지난 여름 풀 아래 자지러지게 울어대던 벌레들의 알의 집이 되었다. 이 숲에 그득했던 풍뎅이들의 혼례(婚禮), 그 눈부신 날개짓소리 들릴 듯 한데, 텃새만 남아 산(山) 아래 콩밭에 뿌려 둔 노래를 쪼아 아름다운 목청 밑에 갈무리한다. 나는 떡갈나무잎에서 노루 발자국을 찾아 본다. 그러나 벌써 노루는 더 깊은 골짜기를 찾아, 겨울에도 얼지 않는 파릇한 산울림이 떠내려 오는 골짜기를 찾아 떠나갔다. 나무 등걸에 앉아 하늘을 본다. 하늘이 깊이 숨을 들이켜 나를 들이마신다. 나는 가볍게, 오늘 밤엔 이 떡갈나무숲을 온통 차지해 버리는 별이 될 것같다. 떡갈나무숲에 남아 있는 열매 하나. 어느 산(山)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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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얼었던 바퀴 자국 밀고 일어서는시(詩)/이준관 2014. 9. 24. 22:43
얼었던 바퀴 자국 밀고 일어서는 풀섶길, 그 풀섶길에 봄까치풀꽃 피었지요. 꿀벌들은 이쁜 사랑의 눈알을 꽁지에도 달고 날아 다니지요. 청둥오리는 푸른 연못을 낳아놓고 떠났답니다. 거미집이 하늘가에 풀어놓은 맑게 갠 날이 며칠째 계속되고 나는 오늘 새로 돋은 풀을 밟고, 해 있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 왔지요. 겨우내 그대 무릎 위에 놓인 뜨개질 실. 내 등솔기를 따뜻하게 내려쬐는 봄 햇볕은 그대가 짠 것일까요? 그대가 강 아래 떨어뜨린 머리빗에 머언 산골짜기 꽃들이 머리 빗기우려 찾아오겠지요. 그대가 치마에 후루루 쏟아놓은 한숨이, 이제는 꾀꼬리 노래 중 가장 고운 가락이 되어 우리들의 구름을 뚫고 솟겠지요. 김칫국에도 목이 메이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이 봄날. 앞산이 내 팔 안으로 안기어오다가 서운히 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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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풀잎시(詩)/이준관 2014. 2. 6. 11:12
나는 풀잎을 사랑한다. 뿌리까지 뽑으려는 바람의 기세에도 눈썹 치켜 올리는 그 서릿발 같은 마음 하나로 참고 버티는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빗물에 휩쓸려간 자국도 푸르게 메워내고 겨울에 얼어 죽는 부분도 입김을 불어넣고 뺨을 비벼주어 다시 푸르게 살려내는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아침이면 이슬을 뿜어 올려 그 이슬 속을 새소리 왁자하게 밀려나오게 하고 착하디착한 햇빛을 받으러하늘로 올려보는 조그만 손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가만히 허리를 일으켜 세워주면 날아가고 싶어 날아가고 싶어 바람에 온 몸을 문질러 보는 초록빛 새 풀잎을 나는 사랑한다. (그림 : 신미란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