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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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강마을을 지나다시(詩)/이준관 2018. 9. 22. 09:49
길은 강으로 뻗어 있다. 파밭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아름다운 날이군요, 하고 인사를 건넨다. 수줍게 인사를 받는 그녀의 목덜미에서 파빛 강이 흔들린다. 보리 이삭이 패기 시작하면서, 태양은 올해 첫 수확의 기쁨을 기다리고, 파꽃은, 얼굴에 총총히 강이 박혀 핀다. 이 동리에 무슨 즐거운 혼사라도 있었던가. 오동꽃이 만발하다. 나는 허리를 굽혀 오동꽃을 줍는다. 개가 짖는다. 누가, 문을 열고 마루로 나오며 누구세요, 하고 묻는다. 달밤이면 마루 끝까지 강물이 밀려오고, 그때도 누구세요, 누구세요, 하고 끝없이 묻겠지. 저, 사람이 그리운 목소리...... 바람이 불면 우는 갈대 지붕. 오늘은, 새들이 꼬리깃털의 거친 바람을 손질하며 강을 거슬러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름다운 목청을 다듬고 있다.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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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보리밭시(詩)/이준관 2018. 9. 10. 00:02
사월. 민들레, 꽃다지, 냉이꽃, 불러 모으는 시골 학교 종 같은 종다리 울면 사람들의 몸에서 보리 냄새가 난다. 추울수록 더 깊이 뿌리를 내리던 보리 발로 밟혀야 더 단단해지던 보리 그 보리에 볼을 부비면 얼었던 내 피가 따뜻해진다. 보리 잎 사이에 거미는 집을 짓기 시작하고 종다리는 보리밭 둥지에 햇살처럼 뽀얀 알을 낳고 아지랑이는 해종일 보리밭 위에서 서성인다. 보리밭 길을 가는 소년의 발부리 밑에서는 소년의 여드름처럼 풀이 돋아나고 보리 이삭처럼 턱수염이 텁수룩한 농부는 보리 잎을 뜯어 씹는다. 바람이 불면 보리들이 풍금처럼 노래하는 사월, 보리 잎처럼 푸르른 날에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해야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해야지. 내 몸에서 보리 냄새가 난다. (그림 : 박준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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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아침이 온다는 것시(詩)/이준관 2018. 3. 6. 19:11
신선한 모유 같은 우유를 배달하러 우유 배달 아줌마가 온다는 것 이팝나무 잎새 같은 학생들 태우러 초록버스가 온다는 것 꽃다지 같은 아기들 태우러 어린이집 노랑버스가 온다는 것 중풍으로 쓰러진 옆집 할머니가 보행보조기를 밀며 아기처럼 걸음마를 다시 배운다는 것 동네 빵집에서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모닝빵을 굽는다는 것 아침 밥상에 놓을 접시처럼 접시꽃이 일찍 핀다는 것 참새들이 대추나무에 풋대추처럼 조롱조롱 매달려 노래한다는 것 내가 창문을 열고 해와 하늘과 그리운 것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아, 그것은 아침이 온다는 것 (그림 : 김순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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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시골길시(詩)/이준관 2018. 2. 18. 19:20
소가 천천히 구름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시골길. 감자밭 감자가 시골 소년의 알통처럼 소리 없이 굵어가고, 명태 꼬리 두어 개 삐죽이 내민 짐 보퉁이를 시골 여인이 머리에 이고 가는 길. 길가 풀섶 둥지에서는 들새가 제 체온으로 데울 만큼의 알을 낳아 따스히 품고 있다. 달콤한 햇볕 아래서 보리앵두는 빨갛게 익어간다. 일부러 해찰을 하듯 날아다니며 나비는 풀꽃마다 꽃가루를 옮기고, 소나기를 머금은 구름은 머얼리서 느리게 천둥소리 피워 올린다. 신발을 벗어버린 내 맨발은 붉은 황토흙이다. 맨발 아래서 질긴 질경이풀처럼 생명 있는 것들이 꿈틀거린다. 내 뜨거운 손을 저무는 해에 얹으면 해 그림자 길게 깔리는 시골길 길 따라 내 삶도 천천히 익어간다. (그림 : 이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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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시(詩)/이준관 2017. 9. 6. 19:09
가을에 사람이 그리울 때면 시골 버스를 탄다 시골 버스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황토흙 얼굴의 농부들이 아픈 소는 다 나았느냐고 소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낯모르는 내 손에 고향 불빛 같은 감을 쥐어주기도 한다. 콩과 팥과 고구마를 담은 보따리를 제 자식처럼 품에 꼭 껴안고 가는 아주머니의 사투리가 귀에 정겹다. 창문 밖에는 꿈 많은 소년처럼 물구나무선 은행나무가 보이고, 지붕 위 호박덩이 같은 가을 해가 보인다. 어머니가 싸주는 따스한 도시락 같은 시골 버스. 사람이 못내 그리울 때면 문득 낯선 길가에 서서 버스를 탄다. 하늘과 바람과 낮달을 머리에 이고 (그림 : 고재군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