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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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거리에 가을비 오다시(詩)/이준관 2017. 6. 13. 11:10
노란 우산 아래로 장화의 물방울을 튀기며 나는 거리로 나선다 비는 말하기를 좋아한다. 자, 나는 들으마, 너는 말하라. 나는 외로운가 보다. 나는 누구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은가 보다. 풋내기 시인처럼 앞뒤 운(韻)이 맞지 않은 네 말소리에 나는 열중한다. 얼간이처럼 바지가 다 젖을 정도로 나는 외로운가 보다. 길가에는 젖은 발들이 흐른다. 젖은 발들이 내 쓸쓸한 발등을 밟는다. 나뭇잎들이 비의 말을 따라 흉내를 낸다.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따먹으며, 나뭇잎은 나보다 더 외로운가 보다. 항상 나에겐 낯설기만 한 비의 알파벳. 이국(異國) 처녀의 눈처럼 파란 비 오는 가을 풍경. 나는 누구를 방문할 일도 없는데 꽃집에 들러 꽃을 산다. 주정뱅이처럼 꽃을 보고 혼자 지껄이는 나는 형편없이 외로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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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흙 묻은 손시(詩)/이준관 2016. 10. 2. 11:17
내가 사는 아파트 가까이 버려진 땅을 일구어 사람들은 밭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촘촘히 뜨개질을 하듯 심은 옥수수와 콩과 고추들. 꿀벌이 날아와 하늘로 꽁지를 치켜들고 대지의 꿀을 빨아들이고, 배고픈 새들은 내려와 무언가를 쪼아 먹고 간다. 아파트 불빛처럼 외로운 사람들은 제 가슴의 빈터를 메우듯 호미를 들고 와 흙을 북돋워주고 풀을 뽑는다. 옥수수 잎에 후드득 지는 빗방울은 사람들의 핏방울로 흐르고, 저녁에는 푸른 별 같은 콩이 열린다. 흙 묻은 손으로 옥수수와 콩과 고추와 나누는 말없는 따뜻한 수화. 사람들의 손길 따라 흙은 순한 사람의 눈빛을 띤다. 사람들은 흙 묻은 손으로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고, 가을이면 흙에서 태어난 벌레들은 식구들의 옷을 기우고 박음질하는 재봉틀 소리로 운다. 슬프고 외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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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꽃 보자기시(詩)/이준관 2016. 5. 3. 22:56
어머니가 보자기에 나물을 싸서 보내왔다 남녘엔 봄이 왔다고. 머리를 땋아주시듯 곱게 묶은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아지랑이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남녘 양지바른 꽃나무에는 벌써 어머니의 젖망울처럼 꽃망울이 맺혔겠다. 바람 속에선 비릿한 소똥 냄새 풍기고 송아지는 음메 울고 있겠다. 어머니가 싸서 보낸 보자기를 가만히 어루만져 본다. 식구들의 밥이 식을까봐 밥주발을 꼭 품고 있던 밥보자기며, 빗속에서 책이 젖을까봐 책을 꼭 껴안고 있던 책보자기며, 명절날 인절미를 싸서 집집마다 돌리던 떡보자기며, 그러고 보면 봄도 어머니가 보자기에 싸서 보냈나 보다. 민들레 꽃다지 봄까치풀꽃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꽃 보자기에 싸서. (그림 : 김은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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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시(詩)/이준관 2016. 3. 9. 10:12
읍내에 갔다가 돌아오는 둑길에는 새떼들도 밟지 않은 저녁놀이 아름답구나. 사과 속에서, 여름의 촌락(村落)들은, 마지막 햇빛을 즐기며 천천히 익어간다. 연한 풀만 가려 뜯어먹던 암소는 새끼를 뱄을까, 암소가 울자 온 들녘이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그득하다. 지붕 위에 초승달 뜨고, 오늘 저녁, 딸 없는 집에서는 저 초승달을 데려다가 딸로 삼아도 좋으리라. 게를 잡으러 갔던 아이들은 버얼겋게 발톱까지 게새끼가 되어 돌아오고, 목책이 낮아, 목책 밖으로 자꾸 뛰쳐나가기만 하던 하늘은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 돌아온다. 처녀들이 몰래 들어가 숨은 꽃봉오리는 오늘 저녁, 푸른 저녁 불빛들에게 시집가도 좋으리라. (그림 : 전운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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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구부러진 길시(詩)/이준관 2015. 7. 7. 16:01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그림 : 김복동 화백) (낭송 :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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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천국의 계단시(詩)/이준관 2015. 5. 26. 09:55
짐을 들고 가는 여자가 언제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떠나노 하고 투덜대며 올라가는 계단이 많은 동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계단에서 하늘과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한다 하늘이 이기면 한 계단 내려오고 아이들이 이기면 한 계단 올라가고 계단을 올라가면 그 계단 끝집에는 해바라기 핀다 해바라기에게 금빛 시간의 태엽을 감아주는 태양 아이들은 가을이면 손에 해바라기 씨를 받아 태양에게 돌려준다 태양은 그 꽃씨를 골고루 동네에 뿌려준다 일숫돈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의 구두에는 씹다 버린 껌처럼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계단이지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이름을 외우며 올라가는 아이들에겐 침이 꿀떡 넘어가는 무지개떡이다 강아지가 배를 깔고 엎드려 잠을 자고 간 계단에 앉아 아이들은 무릎에 턱을 괴고 머언 하늘바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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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저녁별시(詩)/이준관 2015. 4. 12. 18:47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다 오는 소년이 저녁별을 쳐다보며 갑니다 빈 배 딸그락거리며 돌아오는 새가 쪼아먹을 들녘에 떨어진 한 알 낱알 같은 저녁별 저녁별을 바라보며 가축의 순한 눈에도 불이 켜집니다 가랑잎처럼 부스럭거리며 눈을 뜨는 풀벌레들을 위해 지상으로 한없이 허리를 구부리는 나무들 들판엔 어둠이 어머니의 밥상포처럼 덮이고 내 손바닥의 거친 핏줄도 풀빛처럼 따스해옵니다 저녁별 돋을 때까지 발에 묻히고 온 흙 이 흙들이 오늘 내 저녁 식량입니다 (그림 : 김상용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