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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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감나무 한 그루시(詩)/이준관 2015. 4. 12. 18:46
이 가을 나에게는 감나무 한 그루 있어 외롭지 않네. 이 나무 아래서 감꽃을 주우며 그리움을 알았고. 여드름처럼 덜 여문 푸른 감 떨어지는 소리에 첫새벽 푸르게 눈뜨는 법을 배웠네. 바람에 살랑대던 감잎들. 감나무에 매달려 삐걱거리며 즐겁게 노래하던 내 푸른 도드래여. 감나무 그늘에서 속살거리던 귀밑이 홍시처럼 빨개지던 사랑. 그 사랑의 말이 감을 빨갛게 물들이고. 태양은 감을 딸 긴 장대처럼 감나무 끝에 걸쳐 있네. 이 가을 내 혀 밑에서 감씨 하나 여물어가고, 감을 딸 긴 장대 하나 있어 외롭지 않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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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여름밤시(詩)/이준관 2015. 4. 12. 18:45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여름밤은 뜬눈으로 지새우자. 아들아, 내가 이야기를 하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꼭 끼고 가까이 오라. 하늘의 저 많은 별들이 우리들을 그냥 잠들도록 놓아주지 않는구나. 나무잎에 진 한낮의 태양이 깜짝깜짝 깨워놓는구나. 너는 밤새 물어라. 저 별들이 아름다운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 열 손가락에 달을 달아주마. 달이 시들면 손가락을 펴서 하늘가에 달을 뿌려라. 여름밤은 아름답구나. 짧은 여름밤이 다 가기 전에 (그래, 아름다운 것은 짧은 법!) 뜬눈으로 눈이 발개지도록 아름다움을 보자.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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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나무 그늘에 앉아시(詩)/이준관 2015. 4. 12. 18:43
콩밭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다. 뙤약볕을 가리기엔 나무 그늘은 그들의 머리에 두른 수건처럼 너무 작다. 뙤약볕에서 쉬임없이 울어대는 매미가 안쓰러워 가끔 매미가 우는 나무에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며, 그들은 갈퀴 같은 노동의 발을 내놓고 쉬고 있다. 언젠나처럼 그들에게 허락된 푸른 그늘의 휴식은 너무 짧은 것. 다시 뙤약볕에 허리를 굽히면 톱밥난로처럼 빨갛게 달구어지는 그들의 몸. 그러나 이렇게 달구어진 그들의 몸은 겨울이면 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톱밥난로처럼 포근한 휴식을 줄 것이다. 나무 그늘이 그러했듯이.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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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시(詩)/이준관 2015. 4. 12. 18:39
내사 싫소, 싫소. 내 눈에서 그리운 얼굴들을 쏟아버리고 떠나기는 싫소. 보고 싶을 때면 몰래 끄집어내 옹배기 물에 비춰보던 山을 이내 두고 떠나기는 싫소. 콩고물처럼 고물고물 손에 묻히던 이 햇빛들이 나는 좋다우. 그 중 가장 맑은 햇빛 속에서 어서 와, 어서 와, 보채며 나를 부르던 소시적 당신 목소리의 젊은 허리가 나는 좋다우. 내가 죽으면 햇빛으로 건, 바람으로건 당신의 귀뿌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지만, 내사 싫소, 싫소. 이빨과 이빨이 부딪치며 마구 떨리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옹배기 :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진 아주 작은 질그릇. (그림 : 이원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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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그리운 등불시(詩)/이준관 2015. 4. 12. 18:38
-대숲 바람소리를 들으며 시를 쓰고 있는 나태주 시인에게 그리운 사람을 기다릴 때면 대문에 등불을 걸어두었다. 별빛을 머금고 빨갛게 타오르던 그리움의 심지. 그런 밤이면 개들이 유난히 짖어대고, 개들이 짖을 때마다 노오란 살구 같은 별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움만으로도 힘이 되고 아름다움이 되던 시절. 하찮은 풀거미도 저녁이면 제 몸에서 맑은 실을 뽑아 그리움의 별자리를 짜서 풀섶에 걸어두었다. 그리울 일도 슬퍼할 일도 없는 오늘, 나는 노을빛 싸리비로 대문 앞을 쓸고 부엉부엉 울어대는 부엉새 같은 등불을 걸어두고 싶다. 그리운 사람을 기다리며. (그림 : 김용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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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단풍 든다시(詩)/이준관 2015. 4. 12. 18:36
단풍 든다. 붉은 단풍, 붉나무, 신나무, 담쟁이덩굴...... 단풍 든다. 솔잣새 잣잎 쪼으며 울던 고갯재 너머, 칡뿌리 캐어 먹고 사는 산울림. 읍내에서 사온 치마를 햇빛에 비춰보며 눈웃음 웃는 산골 처녀, 잇꽃으로 물들인 연지빛 연정, 멧새가 그만 엿보아버렸는가. 짜르르르 멧새 소리 온 숲에 자지러진다. 들국화 꽃잎 따서 맑은 산그늘에 말려 베개 속에 넣어두고, 처녀야, 겨울 흰 눈 속에 청미래 덩굴 열매로 붉게 맺혀 있거라. 큰 통나무 패서 만든 통나무 김칫독의 배추김치 맛으로 새콤하게 익어 있거라. 단풍 든다. 이 산 저 산 산울림 날아다니며 단풍 든다. 오늘 저녁 죽 끓일 땐 물 한 대접 더 붓고 끓여 문기둥 와서 비치는 청명한 별에게 한 대접만 떠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