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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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옥수수를 파는 여자시(詩)/이준관 2015. 4. 12. 18:33
저 여자가 파는 옥수수를 사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저 여자의 발가락 같은 밭고랑에 씨를 뿌려 그녀의 마른 젖꼭지를 물려 키운 옥수수. 그 옥수수에 박힌 굵은 소나기와 그녀의 넓은 어깨의 싱싱한 노동을. 저 여자의 생의 열기처럼 뜨거운 김이 훅 얼굴에 끼얹어오는 그녀의 밥솥에서 쪄낸 옥수수. 그 옥수수를 아직 아무 것도 깨물지 않은 젖니 같은 첫 이빨로 와락 깨물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저 여자의 옥수수밭처럼 넓게 펼쳐 놓은 치마폭에 놓인 옥수수 좌판. 그녀는 목에 두른 목수건으로 건강한 땀방울을 닦아내고, 나도 그녀의 목수건으로 연신 땀방울을 닦아내며 그녀가 파는 옥수수를 먹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림 : 김정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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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가족, 가을 나들이시(詩)/이준관 2015. 4. 12. 18:32
교외선 기차에서 내린 딸은 코스모스꽃을 향해 달려간다. 코스모스꽃의 허리를 가진 딸은 꿀벌의 물빛 날갯짓에도 흔들린다. 아들은 염소처럼 매해해 운다. 염소의 선량한 뿔이 되고 싶다는 아들. 그 뿔에 들꽃이 걸린다. 하늘빛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아내는 낯선 집 장독대에 핀 맨드라미를 보고 마당이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장독대 위 낮달의 손톱에, 여름에 물들인 봉숭아꽃물이 아직도 엷게 남아 있다. 길가에 알밤이 떨어져 있다. 아들은 알밤을 주우며 이 알밤도 우리 가족이야, 하고 말한다. 저 가을 하늘 울타리가 파랗다.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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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만경강 하구시(詩)/이준관 2015. 4. 12. 18:31
만나자. 만날 테면 만경강 하구에서 만나자. 만나면, 우리는 머나면 서해 바다가 된다. 숭어잡이에서 돌아온 배에서 지느러미가 푸른 숭어를 보자. 숭어야, 비안도 앞바다의 푸른 파도는 잘 있는가. 보름달 뜨면 알을 까러 바닷가로 몰려나오던 게들은 잘 있는가 마늘을 뽑는 아낙네들이 강을 바라본다. 물빛을 닮은 그네들의 눈 밑까지 강물이 넘실대고, 갈대뿌리를 쪼아대던 물새떼들이 강물을 차고 날아 오른다. 아낙네들의 등적삼이 파랗게 젖는다. 무당집이 있는 언덕을 올라가면, 서러웁게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무당집 딸. 낮달 속에 숨은 무당집 딸. 서러운가? 서러우면 밥풀꽃 속에 코를 묻고 미치도록 강물 냄새를 맡아라. 슬픔은 저 혼자 깊어져 강바닥에 닿아라 하자. 바지락을 캐고, 고기 대신, 새우 그물에 노을을 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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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허리를 굽혀시(詩)/이준관 2015. 4. 12. 18:29
들길을 걷다가 허리를 굽혀 길에 떨어진 벼이삭을 줍는다. 들녘에 지는 긴 해 그림자를 밟고 서서 나는 벼이삭을 들여다본다. 벼이삭 하나에도 감사할 게 참 많은데 나는 그 동안 너무 감사한 마음을 잊고 살아왔다. 가난한 어린 시절, 들녘에 떨어진 벼이삭을 주워 치마폭에 담아오던 어머니. 따스한 저녁 불빛이 되어주던 어머니가 주워온 벼이삭. 문득 내 손에 쥔 벼이삭이 늙은 어머니의 틀니처럼 무거워진다. 들머리에 엎드려 씨를 뿌리고 거두는 사람들. 아버지의 괭이가 그러하듯 어머니의 호미가 그러하듯 나는 겸허하게 허리를 굽힌다. 들녘 사람들을 향해. 벼이삭 하나를 향해. (그림 : 김명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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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가을시(詩)/이준관 2015. 4. 12. 18:27
1 가을이라구. 하늘의 낡은 시계추들이 우수수 별들을 떨어뜨리는 가을이라구. 내 정신의 뿌리고 풀잎이고 마구 시꺼멓게 뒤집어 놓고 낄낄낄 웃어대는 가을이라구. 우중충 빗자욱 들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 몹쓸 곰보 같은 가을이라구. 연기는 서쪽으로 정처없는 산을 정하고 춥고 허름한 돌들이 쥐고 있다 풀어준 강물이 한없이 절름거리며 헤매는 가을이라구. 2 이 가을에 그럴싸한 집도 달도 허물어 버리고 혼자 살기로 했지. 발톱 밑에 진흙이나 끼우며 사는 일에도 실패한 이 가을. 자갈밭에 자갈밭에 뱀새끼처럼 징그러운 비린내나 피우며 살기로 했지. 사람들이 내 증오의 거처를 알아내지 못하게 이 세상의 모든 불빛을 끄고 문은 완벽하게 닫아 걸기로 했지. 아아 이제 더는 아무도 사랑않기로 했지. 나의 발 밑에 불구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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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관 - 수양버들시(詩)/이준관 2015. 4. 12. 18:24
시골 냇가에 흔히 서 있는 수양버들을 보겠네. 흘러가는 물을 짝사랑하는 수양버들을 보겠네. 나도, 저 수양버들에 와 우는 붉은뺨멧새 소리에 귀를 괴고 흘러가는 물을 짝사랑할까. 흘러가라. 흘러가는 것은 살아 있는 것, 숨이 차게, 숨이 차게 흘러가라. 갑작스런 낙차를 만나면 용틀임하는 급류(急流)로 일어서며, 바위를 만나면 덩굴식물(植物)처럼 휘감아오르며...... 시골 냇가에 흔히 서 있는 수양버들을 보겠네. 흘러가는 물을 짝사랑해서, 아예 향일성의 허리를 꺾어버린, 흘러가며 굽이치는 분류(奔流)에의 열정. 잎 위로 등때기 푸른 버들치 살아 뛰어오르는, 흘러가라. 흘러가는 것은 살아 있는 것. 어린 시절 불던 버들피리의 강물 마다마디 꺾여 불어줄게 열두 굽이든, 무슨무슨 굽이든, 숨이 차게, 숨이 차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