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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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 가자미식해시(詩)/이동순 2018. 4. 18. 22:21
잘게 썰어놓은 가자미 가지런하게 채 썬 무와 엿기름 밥 한 사발과 양파즙 곱게 간 고춧가루 다진 마늘과 엿기름이 앞에 놓여 있다 밥은 양파즙 껴안고 가자미는 엿기름 보듬어 안고 그 위에 고춧가루 몇 움큼 쥐어 슬슬 뿌려준 다음 전체를 뒤집으며 다정스레 버무려 간다 영감님께서 작은 단지 씻어 와 옆에 갖다 두니 할머니는 다 버무린 것을 그 안에 차곡차곡 쟁여 넣는데 이때 그윽한 손맛은 반드시 따라 들어가는 것 오늘부터 식해는 차고 응달진 곳에서 열흘간의 발효와 숙성 참고 견디며 옛 조상님 지혜와 정성이 듬뿍 밴 모습으로 드디어 진정한 식해가 되어가는 것이다 차갑고 일정한 온도 결코 서두르지 않는 느긋한 끈기 외진 곳의 고독을 이겨내고 모든 재료는 하나로 부둥켜안은 채 진정한 가자미식해로 거듭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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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 비빔밥시(詩)/이동순 2018. 4. 17. 23:30
찔레꽃이 언덕길에 만발한 봄 경남 합천군 야로면 나대리 노인정에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열다섯이나 모였습니다 이 가운데 넷은 경북사람 나머지는 모두 경남사람들입니다 경계가 마을 한가운데로 지나가니 그냥 행정구역상 경남 경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원래부터 한 마을 주민들입니다 오늘은 부엌에서 비빔밥을 준비했습니다 경북 할머니 집에서 갖고 온 미나리 콩나물 경남 할머니 집에서 갖고 온 고사리 참기름 고추장이 한 그릇 안에서 맛있게 비벼집니다 그 다정함이여 사랑스러움이여 모두들 쓱싹쓱싹 비벼서 볼우물이 옴쏙옴쏙 먹으며 마주 봅니다 보면서 웃습니다 이게 바로 세상살이 행복입니다 오, 위대한 비빔밥 남과 북도 이렇게 만나서 하나로 비벼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통일도 얼마나 쉬울까요 (그림 : 허영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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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 오디 똥시(詩)/이동순 2017. 11. 23. 09:54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너른 들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낡은 충효당 대청 난간마루 거기서 마당귀 굽어보니 저절로 돋아나 오래된 산뽕나무 한 그루 서 있네 올해는 어인 오디가 저리도 주렁주렁 열렸나 마을 꼬맹이들 오디 먹고 까만 입술로 재잘거리가 가고 그 뒤를 굴뚝새 가족들 가지에 매어달려 오디 따 먹네 새들도 떠나고 갑자기 텅 빈 대청마루 가지에 매어달다 오디 따먹네 새들고 떠나고 갑자기 텅 빈 대청마루 여기저기 까만 얼룩 무엇인가 굴뚝새 녀석 배불리 먹어대더니 오디 똥 누고갔네 (그림 : 박민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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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 목화다방시(詩)/이동순 2017. 11. 23. 09:46
목화다방을 아시나요 상주 은척 면소재지 장터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숨어서 빠끔히 내다보는 간판 하나가 걸려 있는데요 거기 쥔 마담은 한 자리에서 사십 년 넘도록 시골다방을 지켜 왔대요 봄바람 가을비가 몇 번이나 지나갔나 어느 틈에 회갑을 넘겼다며 배시시 웃는 마담 눈가에 잔주름이 오글오글 돋아나네요 난로 옆에는 칠순이 넘어도 여전히 건달기 가득한 은척 영감님들 서넛 고스톱 치느라 옆 돌아볼 틈도 없는데 국자도 주전자도 벽에 걸린 액자도 불알시계도 모두 모두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앉은 골동품들이랍니다 상주 은척 목화다방 소파에 앉으면 나도 저절로 골동품이 됩니다 (그림 : 백중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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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 아우라지 술집시(詩)/이동순 2017. 7. 22. 19:32
그해 여름 아우라지 술집 토방에서 우리는 경월소주를 마셨다 구운 피라미를 씹으며 내다보는 창밖에 종일 장마비는 내리고 깜깜한 어둠에 잠긴 조양강에서 남북 물줄기들이 서로 어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염이 생선가시같이 억센 뱃사공 영감의 구성진 정선아라리를 들으며 우리는 물길 따라 무수히 흘러간 그의 고단한 생애를 되질해 내고 있었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셋쪽이 나지만 삼팔선 깨어지면 한 덩어리로 뭉치지요 한순간 노랫소리가 아주 고요히 강나루 쪽으로 반짝이며 떠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흐릿한 십촉 전등아래 깊어가는 밤 쓴 소주에 취한 눈을 반쯤 감으면 물 아우라지고 사람 아우라지고 우리나라도 얼떨결에 아우라져 버리는 강원도 여량땅 아우라지 술집. (그림 : 이상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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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 선술집 탱고시(詩)/이동순 2016. 7. 18. 14:43
하루해 저물어가네 저 멀리 빗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뱃고동소리 보이네 바다로 나간 해녀들 허기진 마음 등에 지고 돌아오네 비린내 풍기는 항구의 뒷골목으로 늘 먼지 낀 유리창 허름한 탁자 젖은 눈에 서려오는 세상은 희뿌연 안개 술집 작부 몇이 둘러앉아 수상한 물안개 데리고 노네 그들 틈으로 담배연기 황급히 도망치네 심심한 갈매기는 텅 빈 부두에서 줄곧 스타카토로 무언가를 날카롭게 보채네 이제 그들의 꿈과 날개는 어느 먼 나라로 훨훨 날아가버렸나 쓸쓸한 술집에서 종일 수평선만 바라보는 늙은 어부들 오, 그들 살아온 길 보이네 거친 파도와 고장 난 나침판 찢어진 그물코 사이로 빠져 달아난 물고기 그 끝으로 서둘러 떠나간 여인이 눈에 암암 떠오르네 (그림 : 김주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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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 풍경소리시(詩)/이동순 2016. 7. 18. 14:39
그 식당 추녀엔 물고기가 달아나고 종만 댕그랗게 남은 풍경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쓸쓸한 모습을 보며 내가 물고기를 만들어 달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비 오던 밤 나는 청동물고기를 만들어 비늘도 새기고 지느러미도 새기고 마지막엔 눈알을 새겼답니다 그 청동물고기를 품에 안고 혼자 있던 종에게 다가가 달아주었어요 한 순간 바람이 일며 물고기가 종체를 일깨웠지요 한없이 맑고 낭랑한 소리가 꽃향기처럼 피어나 반곡지 쪽으로 불어 갔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그 풍경소리를 들었습니다 반곡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반곡리에 있는 저수지 (그림 : 이장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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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 멍게 먹는 법시(詩)/이동순 2016. 7. 18. 14:38
나는 갯것이 좋다 갯것들 중에서도 멍게가 좋다 왜냐하면 멍게는 깊은 바닷속 바위틈에서 긴긴날 혼자 생각에 잠겼던 기막힌 고독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통한 알맹이 그 속살을 반으로 갈라 통째 입에 넣고 씹지 말 것 그저 차분히 멍게를 머금은 채 소주 한 잔 털어 넣고 지그시 눈만 감을 것 그때 은은히 감도는 멍게향기는 필시 고독의 내음일지니 이윽고 입속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사태 소주와 멍게는 서로 부둥켜안고 블루스를 춘다 스텝을 맞추며 빙빙 돌아가는 나의 입안은 바로 녀석들의 무도장 그들의 블루스가 끝날 때쯤 언제든지 멍게를 삼켜도 좋다 (그림 : 최윤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