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유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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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주름잡으며 살아 왔네시(詩)/유안진 2016. 8. 3. 14:17
누워서 먹고 싸는 젖아기가 어느 날 갑자지 제 몸을 스스로 뒤집었다는 젊은 엄마의 자랑을 듣고 듣다가 제정신이 뒤집혀지는 사랑 끝에 생긴 아기는 그 힘을 물려받아 제 몸을 뒤집는가 하다가 뒤집어 엎어야 놀라운 자랑거리가 되고말고 내게도 그런 꿈이 있긴 있었는데 세상을 통채로 뒤집어 엎고 싶었던 피 끓던 한때가 분명 있었는데 세상이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뒤집어 엎을 그 꿈을 뒤집어 엎느라고 결국은 팽팽하던 얼굴만 뒤집혀지고 말았지 뒤집혀서 주름잡힌 얼굴을 비쳐볼 때 마다 세상은 비록 뒤집어 엎지 못했을 망정 내 인생 하나만은 뒤집어 엎었다고 세상을 주름잡으며 살아오진 못했을망정 내 얼굴 하나만은 주름잡으려 살아왔다네 (그림 : 김대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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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춘천은 가을도 봄이지시(詩)/유안진 2015. 12. 5. 10:32
(낭송 : 유안진) 겨울에는 불광동이, 여름에는 냉천동이 생각나듯 무릉도원은 도화동에 있을 것 같고 문경에 가면 괜히 기쁜 소식이 기다릴 듯하지 추풍령은 항시 서릿발과 낙엽의 늦가을일 것만 같아 春川도 그렇지 까닭도 연고도 없이 가고 싶지 얼음 풀리는 냇가에 새파란 움미나리 발돋움할 거라 녹다만 눈 응달 발치에 두고 마른 억새 깨벗은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피고 있는 진달래꽃을 닮은 누가 있을 거라 왜 느닷없이 불쑥불쑥 춘천을 가고 싶어지지 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 가서, 할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라 그저, 다만 새봄 한 아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몽롱한 안개 피듯 언제나 춘천 춘천이면서도 정말, 가본 적은 없지 엄두가 안 나지, 두렵지, 겁나기도 하지 봄은 산 너머 남촌 아닌 춘천에서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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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시(詩)/유안진 2014. 8. 14. 02:11
유안진(柳岸津) 1941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대전여자중학교, 대전호수돈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마산제일여자중·고등학교와 대전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1970년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였고, 1976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신여자대학교·단국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가르치다가 1981년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아동가족학과 교수가 되었다. 1965∼1967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달〉 〈별〉 〈위로〉가 3회 추천되어 등단하였고, 1970년 첫 시집 《달하》를 출판하였다. 이향아·신달자와 함께 펴낸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1986)에 실린 〈지란지교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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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내가 나의 감옥이다시(詩)/유안진 2014. 8. 14. 02:09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죽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을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그림 : 이동업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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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나는 늘 기다린다시(詩)/유안진 2014. 8. 14. 01:34
늦은 밤 늦은 귀가를 기다리며 아이들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아이들이 돌아온 다음에도 여전히 기다린다. 늦지 않는 밤에도 기다리는 나는 나의 귀가도 기다리는 줄 몰랐다. 나는 나를 너무 자주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떠나가서 늦은 나의 귀가를 너무 먼 나의 귀갓길을 돌아오지 않는 나를 날마다 기다리고 기다려왔다. 나는 어딜 가서 무얼 하느라고 늘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가 나를 기다리게 하는 나는 언제부터 무슨 까닭으로 나를 떠나가서 이렇게 기다리고 기다리게 할까. 내가 부재하는 어디에도 기다리는 내가 있다. 도대체 나는 어떤 나를 기다리느라 대문간 골목길 정류장마다 그림자를 걸어두고 귀를 열어둔 채 안절부절 서성거리는 걸까. (그림 : 김성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