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유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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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침묵하는 연습시(詩)/유안진 2013. 12. 17. 22:37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그림 : 김용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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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차이, 별거 아니야시(詩)/유안진 2013. 12. 17. 22:36
남녘에서 불어오면 마파람이 되고, 서쪽에서 불어오면 하늬바람이 되고, 마음에서 불면 신바람이 되는 바람도, 그냥 떠도는 바람일 뿐이고 침과 피와 땀과 눈물 콧물 오줌도, 온 몸을 돌고 도는 몸 속의 물, 다 같은 물일 뿐이야 더구나 물과 불은 쓰고 있는 모자가 다를 뿐이고, 울음과 웃음도 신고 다니는 신발의 차이일 뿐이니, 옷 갈아입듯 바꿀 수 있지 성별 성씨 국적에 얼굴도 바꿔 가면 사는 시대에, 모자나 신발쯤이야 하고, 모자 사러 나가면서 신발만 바꿔 신었는데도, 기분이 한결 달라졌다, 모자든 신발이든 하루에 몇 번씩이나 바꿔가며 살 일이야 (그림 : 박지오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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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배꼽에 손이 갈 때시(詩)/유안진 2013. 12. 17. 22:36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다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도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그림 : 장호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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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그림자를 팔다시(詩)/유안진 2013. 12. 17. 22:35
모임에 갔더니 먼저 와서 웃고 떠드는 내가 있지 않는가 그는 나보다 더 잘 웃고 웃기도 좋아 내가 그의 못난 짝퉁 아닌가 의심마저 들었다 정신 차리고 끼어들어 인사를 해도 다들 본체만체 있는 내가 없는 내가 되어 버렸는데 눈길이 마주친 그는 얼른 외면해 버린다 팔 거라고는 그림자 밖에 없어서 그림자에게도 흰머리가 돋거나 주름이 생기기 전에 얼른 팔아야 제값 받을 것 같고 팔고 나도 쉽게 또 생길 줄 알았지 햇빛 눈 부시는 날 빌딩을 지날 때나 네온 불빛 현란한 밤거리에서도 떼지어 나와서 따라다녔으니까 비 올 때나 어두운 곳에서는 안 보이다가도 어떤 때 어떤 곳에서는 한꺼번에 몰려나왔으니까 하나쯤 없어도 괜찮을 줄 알았지 유령이 사 갈 줄은 꿈에도 몰랐지 대신 내가 유령이 될 줄은 더 더욱 몰랐지 흉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