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유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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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엿 먹어라시(詩)/유안진 2019. 1. 18. 22:00
가위소리에 솔깃해져 인사동골목으로 접어들자, 문득 마주치는 엿타령에, 덜렁 한 봉지 사버렸다 “엿사시영 여사뿌렁" 울능도라 호박엿을 전라도라 찹쌀엿을 강원도라 감자엿을 엿사시영 엿을 싸이 울긋불긋 호박엿을 찰싹 앵긴다 찹쌀엿을 강원도라 메밀엿을 경상도라 접쌀엿(보리엿)을 강냉이엿 술엿 파(팥)엿을 함경도라 길따란 도드름엿 평안도라 넓찍하구 딩구런 엿을 모단 세상 정 맞것다 둥글둥글 호박엿을 떠난 사람 임 기리운데(그리운데) 찰삭 붙은 찹쌀엿을…“ 이명(耳鳴) 같은 속요가 끈날 즈음에, 상소리 욕설 "엿 먹어라"들이 왁자하게 쏟아진다 엿도 인생처럼 좋고 안좋은 여러 말뜻이 엉겨붙어, 몸 섞이고 마음 섞여 단맛이 된거니까 해마다 섣달 그믐에는 아궁이에 개엿을 발라서 상제(上帝)께 올라간 조왕신의 입이 붙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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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그림자도 반쪽이다시(詩)/유안진 2018. 11. 2. 22:32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꺼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눈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처졌다 오른쪽 팔다리가 더 길어서 왼쪽 신이 더 빨리 닳는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 오고 그쪽 어깨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몸이구나 아플 때만 내 마음이구나 남이 아픈 줄을 내가 어찌 알아 몸도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구나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그림 : 최정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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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간고등어 한 손시(詩)/유안진 2018. 9. 15. 19:50
아무리 신선한 어물전이라도 한물간 비린내가 먼저 마중 나온다 한물간 생은 서로를 느껴알지 죽은 자의 세상도 물간 비린내는 풍기게 마련 한마리씩 줄 지은 꽁치 옆에 짝지어 누운 간고등어 껴안고 껴안긴 채 아무렇지도 않다 오랜 세월을 서로가 이별을 염려해온 듯 쩔어든 불안이 배어 올라가 푸르러야 할 등줄기까지 뇌오랗다 변색될수록 맛들여져 간간 짭조롬 제 맛 난다니 함께한 세월이 갈수록 풋내나던 비린 생은 서로를 길들여 한가지로 맛나는가 안동 간고등어요 안동은 가본 적 없어도 편안 안(安)자에 끌리는지 때로는 변색도 희망이 되는지 등푸른 시절부터 서로에게 맞추다가 뇌오랗게 변색되면 둘이서도 둘인줄 모르는 한 손으로 팔리는 간고등어 한쌍을 골라든 은발 내외 뒤에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반백의 주부들 (그림 : 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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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고양이, 도도하고 냉소적인시(詩)/유안진 2018. 8. 15. 22:40
나에게서 호랑이를 찾으려 하지 마라 나를 읽은 눈에는 스핑크스가 보이고 그의 사막 그의 절대고독을 누리게 되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들 제 발로 달려와 더불어 아득한 높이만큼 드높아지지 오직 스핑크스만이 나의 자세로 앉아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16시간쯤이야 별 것 아니지 달콤한 잠에 취해 인간보다 더 꿈꾸지 낭만도 더 누리지 지구에 사는 자 중 가장 꿈이 많은 나를 꿈 없는 어류나 파충류와는 비교도 하지마라 다람쥐 코끼리 곰과도 친한 나의 다문화적 친화성을 흠모하여, 천하의 맹수들이 내게로(고양이과)로 모였지 오로지 외로운 평화(平和)와 호사(豪奢)외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나의 사명은 날마다 길모퉁이 담장 위에 올라앉아 여린 겨울 햇볕 차가운 바람에 한 올씩의 터럭만을 헹구어내는 일이지 무릎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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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 갈색 가을, 샹송의 계절에시(詩)/유안진 2018. 7. 24. 23:16
세상도 갈색으로 마음 고쳐 먹는 가을 원경에서 근경으로 젖은 바람 불어온다 함께 걸어도 혼자가 되는 갈색 목소리가 외로움의 키가 몸보다 커서, 늘 목이 잠겼던, 목쉰 고독 이 혼자 부르는, 플라타너스 잎잎을 갈색으로 적시다가, 발걸음도 발자국도 다갈색으로 적신다, 바람도 빗줄기도 목이 메이어, 다갈색 골목을 진갈색으로 따라와, 앞장도 서고 나란히도 걸으면서,낙엽보다 낙엽답게 다저녁을 밝힌다, 불빛보다 서럽게 저 혼자서 흐느낀다, 밟히는 낙 엽 소리 젖은 촉감까지 다갈색과 진갈색을 섞바꾸는 키 작은 여자의 죽어서도 외로워 잠긴 목이 안 풀린 에디뜨 삐아프의. (그림 : 김경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