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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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개부처손시(詩)/김선우 2016. 1. 3. 09:46
개두릅 개복숭아 개살구 개머루 개꿈 개떡 같은 참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닌 함부로 된 걸 말하는 개, 라는 접두사가 부처님 손바닥처럼 생긴 풀 앞에 그것도 좀 모자란 듯한 잘디잔 손바닥 앞에 이름 붙어 개부처손이라 했다 납작한 바위를 감싸며 깊은 그늘 만들고 있는 고작 엄지손톱만한 초록빛 개부처손 앞에서 서성거린다 저잣거리의 좀 덜된 무명씨 같은 이도 부처 될 만하다는 것 같기도 하고 막된 인사(人事)보다 개가 부처를 이루는 게 도리라는 것도 같고 개나 소나 팽나무나 바위나 그저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던 것들 중에 이미 부처를 이룬 것들 수두룩할 것 같고 개부처손 : 석송강 부처손목 부처손과의 상록 여러해살이풀. 산지의 바위 위에서 자란다. 땅속줄기는 옆으로 뻗고 잎이 드문드문 달리며 끝 부분이 위로 솟아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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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부쳐 먹다시(詩)/김선우 2016. 1. 3. 09:44
강원도 산간에 비탈밭 많지요 비탈에 몸 붙인 어미 아비 많지요 땅에 바싹 몸 붙여야 먹고 살수 있는 목숨이라는 듯 겨우 먹고 살만한 '겨우' 속에 사람의 하늘이랄지 뜨먹하게 오는 무슨 꼭두서니빛 광야같은 거랑도 정분날 일 있다는 듯 그럭저럭 조그만 땅 부쳐먹고 산다는…… 부쳐 먹는 다는 말 좋아진 저녁에 번철에 기름 둘러 부침개 바싹 부치고 술상 붙여 그대를 부를래요 무릎 붙이고 발가락 붙이고 황토빛 진동하는 살내음에 심장을 바싹 붙여 내 살을 발라 그대를 공양하듯 바싹 몸 붙여 그대를 부쳐 먹을래요 (그림 : 정지석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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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떡방앗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주세요시(詩)/김선우 2016. 1. 1. 07:06
차가운 무쇠 가래떡 기계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김 오르는 따듯한 살집 같은 다정한 언니의 영원한 발목 같은 뜨거운 그리운 육두문자 같은 배를 만져주던 할머니 흰 그림자 같은 눈물의 모음 같은 너에게 연결되고 싶은 쫄깃한 꿈결 같은 졸음에 겨운 흰 염소 눈 속에 부드럽게 흰 느린 길 같은 노크하자 기다랗게 뽑아져 나오는 잃어버린 시간 같은 안심하고 두 손에 받아들어도 무기라고 의심받지 않을 기다란 것이 말랑하고 따듯한 명랑한 웅변처럼! 떡방앗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오는 뜨거운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 하듯 양끝에서 먹어 들어가기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한 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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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거기쯤에서 봄이 자글자글 끓는다시(詩)/김선우 2015. 5. 24. 10:28
세상에 소음 보태지 않은 울음소리 웃음소리 그 흔한 날개짓 소리조차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뿔도 침도 한 칸 집도 모래 무덤조차도 배추흰나비 초록 애벌레 배추잎 먹고 배추흰나비 되었다가 자기를 먹인 몸의 내음 기억하고 돌아오는 모양이다 나뭇잎 쪽배처럼 허공을 저어 돌아온 배추흰나비 늙어 고부라진 노랑 배추꽃 찾아와 한 식경 넘도록 배추 밭 고랑 벗어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지니고 살지 않아도 무거운 벼랑이 몸속 어딘가 있는 모양이다 배추흰나비 닻을 내린 늙은 배추 고부라진 꽃대궁이 자글자글 끓는다 (그림 : 노숙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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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간이역시(詩)/김선우 2015. 5. 24. 10:14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섭처럼 나타나던 좋, 아, 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 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던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 날 알지 못했던 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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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오동나무의 웃음소리시(詩)/김선우 2015. 3. 8. 00:32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 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히 바지를 벗어 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때 왜 그 소릴 부끄러워 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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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대관령 옛길시(詩)/김선우 2014. 9. 30. 12:02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화주(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그림 : 김지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