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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섭처럼 나타나던 좋, 아, 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 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던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 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 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맵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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