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허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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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순천 아랫장시(詩)/허형만 2016. 1. 16. 09:03
장날이면 이른 새벽부터 온 집안이 잔치 집처럼 들썩거렸다 어머니는 열무를 보기 좋게 가지런히 다듬고 나는 밭에서 이슬 젖은 깻잎을 뜯느라 손톱 밑이 새까만 손으로 깻잎을 간추려 다발로 묶었다 할머니는 채소들이 수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뿌리거나 젖은 무명베를 광주리에 담긴 채소들 위에 덮었다 아랫장까지는 십리 길, 당숙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수지 방죽을 지나 장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는 광주리를 이고 나는 리어카에 고추며 열무를 싣고 희희낙락, 아직은 이슬 어린 햇살을 밟으며 장으로 갔다 장날이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말끔하게 차려입은 밤재골 이모랑 이모부를 만나고 해룡면사무소 주사인 외삼촌과 외숙모도 만났다 깻잎이며 열무며 고추까지 다 팔고 난 파장 무렵이면 우리는 손가락이 예쁜 아주머니의 국밥집 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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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이순(耳順)의 어느날시(詩)/허형만 2015. 10. 24. 14:50
달빛에 흔들리는 댓잎처럼 여직 내 몸에서 푸른 비린내 서걱이는 소리 들린다 이 나이면 낯빛 우럭우럭 해지는 해거름 바닷가에 쯤 나앉아 있는 듯 하여 구름발치 머언 들목 쪽 향해 깨금발 딛고 목 뺄일 없을 듯 하여 산절로 나절로 이 아침 맑은 바람이나 벗삼고 연꽃처럼 풍란처럼 멀리 갈수록 맑아지는 향기나 머금으려 했더니 어인 일이냐 내 몸이여 댓잎에 흔들리는 달빛처럼 아직도 자욱한 달안개 속이라니 이순(耳順) : 귀가 순해진다는 뜻으로, 나이 60세의 비유적인 표현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과 통하기 때문에 거슬리는 바가 없고, 아는 것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 (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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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이름을 지운다시(詩)/허형만 2015. 8. 14. 21:20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면 먼대로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고도 침침해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름을 지우겠지 그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 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그림 : 장용길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