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허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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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화개동천에서시(詩)/허형만 2015. 1. 16. 11:17
우리가 그곳에 다다른 날은 화엄벚꽃 이미 시간의 물길에 녹아 십리화개를 후르르 떠난 뒤였다 그래도 아직 무슨 미련 남아 미처 떠나지 못한 꽃잎 몇은 하동포구까지 내려와 다압쪽 나룻배가 건너오길 초초히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가 말했는가 가야할 시간을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그러나 정작 떠나보낼 수 없는 내 사랑 애절한 그리움도 있느니 눈물보다 더 무거운 내 사랑 쓸쓸한 저녁도 있느니 화개동천(花開洞天) : 화개동천은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 있는 ‘화개장터 에서 시작하여 쌍계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지금은 이른바 ‘10리 벚꽃길로 유명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화개동천으로 알려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비롯한 유학자들의 산수유람 길이었다. 화개동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쌍계사에서 흘러내리는 화개천을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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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목포를 떠나며시(詩)/허형만 2015. 1. 16. 11:12
한 곳에 심지 세우며 마음 깊이 뿌리내리고 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얼마를 더 살지는 모를 일이다만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다보니 느느니 빚 뿐이거늘 고하도 앞바다로 무너지는 파도도 째보선창 구석구석 남루한 냄새도 양을산 중턱 응달배기 허름한 무덤풀도 나의 중년을 키워온 밥줄이었는데 그 밥줄 미련없이 끊고 남은 세월만큼 헐거운 육신 하나 이끌며 떠난다, 아득한 신열 앓는 땅으로 그러나 어디 쉬운 일인가 아픔으로 아픔을 이기며 또 다른 한 곳에 심지 세워 살기가. 째보선창 : 전라남도 목포시의 유달동에 소재한 선창이다. 시의 온금동(순수 우리말로 다순구미) 앞쪽에 배를 댈 수 있는 조그마한 만(彎)이 있었는데 이곳에 부두시설을 설치하면서삼면을 막고 한 면만을 열어놓아서 언청이 모습을 하였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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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겨울 들판을 걸으며시(詩)/허형만 2015. 1. 16. 11:09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림 : 정인성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