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허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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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1월의 아침시(詩)/허형만 2023. 1. 2. 06:34
세월의 머언 길목을 돌아 한줄기 빛나는 등불을 밝힌 우리의 사랑은 어디쯤 오고 있는가. 아직은 햇살도 떨리는 1월의 아침 뜨락의 풀뿌리는 찬바람에 숨을 죽이고 저 푸른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살아갈수록 사람이 그리웁고 사람이 그리울수록 더욱 외로워지는 우리네 겨울의 가슴, 나처럼 가난한 자 냉수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깨끗해진 두 눈으로 신앙 같은 무등이나 마주하지만 나보다 가난한 자는 오히려 이 아침 하느님을 만나 보겠구나. 오늘은 무등산 허리에 눈빛이 고와 춘설차 새 잎 돋는 소리로 귀가 시린 1월의 아침 우리의 기인 기다림은 끝나리라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땅도 풀리고 꽃잎 뜨는 강물도 새로이 흐르리라 우리의 풀잎은 풀잎끼리 서로 볼을 부비리라. 아아,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무등산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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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아들에게시(詩)/허형만 2021. 11. 9. 22:35
아들아 이 애비에게 시간의 의미를 묻지 마라 지금 너희 나이 때 애비가 어느 간이역 담장에 기대어 피어 있는 장미꽃을 만났는지 어느 강가에서 강물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단다 아들아 이 애비에게 삶이란 무엇인지 묻지 마라 지금 너희 나이 때 애비도 그 누구로부터 삶의 정의를 듣지 못했다 다만 홀로 밤하늘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렇게 할 수 있음에 감사했을 뿐이다 우리가 스치고 지나온 것들 우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들 예기치 않게 정수리에 꽂히는 비꽃 한 방울 한 겨울 숨을 고르며 흐르는 얼음장 밑 개울물 소리 지나오고 보니 그것이 시간이었다 지나오고 보니 그것이 삶이란 거였다 (그림 : 조규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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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만 - 주름에 관한 보고서시(詩)/허형만 2020. 8. 22. 15:12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주름의 골을 파헤지는 세월의 보습이 반질반질하게 빛난다.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가 있나요 서유석처럼 흥얼거리다가 면도기가 계엄군인 양 턱을 점령할 때쯤 콧노래가 딱 멈춘다. 거울은 심장이 약하다. 주름의 골이 깊이 패어 갈 때마다 거울은 한사코 외면한다. 한겨울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너 늙어 봤냐 나는 젊어 봤단다 또 다시 흥얼거리는 내가 쓸쓸해지려 한다. 저물녘 세상에서 황급히 귀가하는 꽁지 붉은 새처럼 오늘도 주름은 황온을 갈아엎는 보습의 날카로운 이를 두려워하는 것인데 거울은 주름의 깊은 속내를 다 안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보습 (명사) : 쟁기의 술바닥에 끼워 땅을 갈아 흙덩이를 일으키는 데에 쓰는 삽 모양의 쇳조각 (그림 : 송영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