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송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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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비지장 먹는 저녁시(詩)/송진권 2014. 9. 8. 15:33
순두부 빛 살구꽃 덩을덩을 엉긴 마당 돼지기름 미끈한 고깃집에 앉아 구쿰한 비지장을 먹는다 도야지 비계와 신김치가 들어간 비지장을 한 숟갈 퍼넣고 썩썩 비비면 간수 먹은 하늘에 뿌옇게 엉기는 별 장판이 타들어가게 불을 지핀 아랫목 비지장 띄우는 내 곱은 손을 호호 불어주던 사람도 가고 송아지에게 덕석을 입혀주던 이들도 갔지만 아직 무르던 발굽은 잊지 못한다 그 퀴퀴하다고만 할 수 없는 구쿰한 비지장 띄우는 냄새를 손님이야 있건 말건 꾸벅꾸벅 조는 사내를 뚱뚱한 여자는 쉰 목소리로 타박하다 개숫물을 행길에 함부로 뿌린다 비로소 고향이다 (그림 : 박영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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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대숲시(詩)/송진권 2014. 9. 8. 15:32
오밤중, 대숲이 날 거두어들였을 적에는 대숲에 들러붙은 별들이 댓잎을 갉아대고 있었습니다 흠뻑 물기 머금은 바람이 그것들을 쓸어서는 한 섬이나 산 능선에 모아놓자 너울너울한 대숲은 빼곡히 수직으로 기립해서 제 무슨 비늘 달린 즘생이나 되는 듯이 숨을 몰아쉬며 웅크렸는데요 댓잎들이 몸을 뒤채 비늘 단 즘생의 몸을 이루고 후두둑 한번 몸을 떤 뒤 펄쩍 몸을 솟구쳐 중천으로 뛰어오르면 산이며 들이며 먼 인가의 불빛들이며는 다 그 앞에 부복할 터인데요 중천을 치받으며 즘생을 이룬 몸뚱이서 별들은 툭툭 떨어져내리다 팽그르르 돌다가 희미하게 가물가물 삭아 없어지기도 했는데요 중천의 달 모가지를 거머쥐며 슬슬 큰 즘생을 거느리고 나는 내가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었는데요 (그림 : 김민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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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절 골시(詩)/송진권 2014. 9. 8. 15:15
고종내미 갸가 큰딸 여우살이 시킬 때 엇송아지 쇠전에 넘기구 정자옥서 술국에 탁배기까정 한잔 걸치고 나올 때는 벌써 하늘이 잔뜩 으덩그려졌더랴 바람도 없는디 싸래기 눈이 풀풀 날리기 시작혔는디 구장터 지나면서부터는 날비지 커튼 함박눈이 눈도 못 뜨게 퍼붓드라는구만 금매 쇠물재 밑이까지 와서는 눈이 무픞꺼정 차고 술도 얼근히 오르고 날도 어두어져오는디 희한하게 몸이 뭉근히 달아오르는디 기분이 참 묘하드라네 술도 얼근허겄다 노래 한자락 사래질 꺼정 해가며 갔다네 눈발은 점점 거치고 못뚝 얼음 갈라지는 소리만 떠르르하니 똑 귀신 우는 거거치 들리드라는구만 그래 갔다네 시상이 왼통 허연디 가도 가도 거기여 아무리 용을 쓰고 가두 똑 그 자리란 밝고 뺑뺑이를 도는겨 이러단 죽겄다 싶어 기를 쓰며 가는디두 똑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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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무수시(詩)/송진권 2014. 9. 8. 15:12
숱한 세월이 흘렀는디두 어제 일 겉다야 눈이 어둔 우리 고모 시래기 거튼 푸석한 손으로 막걸리 자신 입을 훔치며 무짠지 집어들고 찬찬히 그때를 짚어보시는디 하늘이 무수 대강이에 오른 파랑물 같은 봄날 해토한 움을 열고 우리 고모부 고종남씨 무수를 꺼냈겄다 삼동을 날 동안 무수 하나로 조석을 해댄 억척배기 우리 고모 박딸금씨도 그 저티서 광우리 무수를 담고 있었는디 얼렐레 내남적없이 하 배고픈 봄날에 박딸금씨 기중 못난 무수 하날 골라 쓱쓱 광목치마 말기에 닦아 한입 베물려는디 담배참으로 아지랑이나 쳐다보며 해찰하던 고모부 고종남씨가 여편네 고쟁이 새로 뵈는 무수 거튼 허연 다리통을 보고 만 거라 마음이 동한 고종남씨 싫다는 고모를 끌고 물 마른 봇도랑 새로 들어가 일을 벌이셨다는디 어따야 쉰밥 취급하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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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각인시(詩)/송진권 2014. 9. 8. 15:08
기억하니 물기 많았던 시절 그래서 더 깊이 패었던 시절 아직도 생각나니 달구지 타고 맨발 들까부르며 우리 거기에 갈 때 지네뿔에 발굽이 크던 소 양쪽 뿔에 치렁치렁 늘인 칡꽃 질컥한 길에 빗살무늬로 새겨지던 바큇자국 뒤따르던 질경이꽃 햇볕 사려감던 바큇살 어룽대며 곱던 햇발이며 연한 화장품 냄새 다시 돌아올 사람들과 다시 오지 못할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발을 들까부르며 쇠꼬리에 붙는 파리나 보며 시시덕대던 시절 물기 많았던 그래서 더 깊이 패었던 시절을 (그림 : 이육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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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맹꽁이 울음소리시(詩)/송진권 2014. 9. 8. 15:02
소란스레 후두둑 막 퍼붓다가 들이붓다가 흙탕물 이뤄 떠난 것들을 따라가지 못한 물방울들이 칭얼대며 머위 잎이나 오동나무 새순에 엉긴 밤이구요 똑똑 물방울 듣는 소리 사이사이로 듣는 저 소린 분명 맹꽁이 울음소리인데요 황소가 영각을 쓰며 벽을 들이받듯 세상의 옆구릴 들이받는 이 소릴 따라 찬찬히 가보면 청솔가지 매운 연기 매캐한 집안 눈물 많은 식구 중 하나가 눈물 훔치며 뚝뚝 나뭇가질 분질러 아궁이에 불을 넣고 있을 거구요 내가 아직 뿔이 돋기 전 이도 나기 전 그저 하나의 숨이었을 때 보드라운 살덩이 하나로 살붙이들 가슴에 안겨서 들었을 이 소리 속에는 고모며 고모부며 그 고모의 아들딸들이며 마실 온 이웃 아주머니들까지 둘러앉아 감자에 소금 찍어먹으며 왁자하게 웃고 떠들며 얘기를 하고 있을 것이지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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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추석 만월시(詩)/송진권 2014. 9. 8. 14:58
애탕글탕 홀아비 손으로 키워낸 외동딸이 배가 불러 돌아온 거나 한가지다 동네 각다귀 놈과 배가 맞아 야반도주한 뒤 한 이태 소식 끊긴 여식 더러는 부산에서 더러는 서울 어디 식당에서 일하는 걸 보았다는 소문만 듣고 속이 터져 어찌어찌 물어 찾아갔건만 코빼기도 볼 수 없던 딸년 생각에 막소주 나발이나 불던 즈음일 것이다 호박잎 그늘 자박자박 디디며 어린것을 포대기에 업고 그 뒤에 사위란 놈은 백화수복 들고 느물느물 들어오는 것 같은 것이다 흐느끼며 큰절이나 올리는 것이다 마음은 그 홀아비 살림살이만 같아 방바닥에 소주병만 구르고 퀴퀴하구나 만월이여 그 딸내미같이 세간을 한번 쓰윽 닦아다오 부엌에서 눈물 찍으며 조기를 굽고 저녁상을 볼 그 딸내미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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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주걱이 설 때시(詩)/송진권 2014. 7. 3. 00:47
처음엔 싸게 불을 피우면서 눌어붙지 않게 주걱으로 잘 저어줘야 햐 눌커나 타면 화근내가 나서 못 먹어 계속 천천히 저어줘야 햐 딴전 피거나 해찰부리면 금세 눌어붙어 못 써 뒷간엘 가도 안 되고 잠시잠깐 자리를 떠도 안 되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이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여 땀이 쏟아져도 젓는 걸 그만두면 안 되야 오직하면 이게 땀으로 만든 거라고 안 햐 시방이야 가스불로 하니께 편해졌지만 예전에는 혼자 불 때랴 저으랴 아주 대간했지 내굽기는 또 왜 그리 내군지 눈물콧물 쏙 뺐어 되직하니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면 뭉근하게 불을 죽이고 뜸을 들이는 겨 그래 다 되었다 싶을 때 주걱을 세우면 주걱이 바로 서는 거여 그럼 도토리묵이 다 쑤어진 거여 (그림 : 이원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