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송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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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보리밭의 잠시(詩)/송진권 2014. 4. 23. 23:19
너무 여물어 빨빨 쇤 보리밭 말고 아직 연한 보리밭쯤이면 될랑가 그것도 평지에 펀펀히 드러누운 보리밭 말고 산날망 넘어오는 뙤똥한 보리밭쯤이면 어떨랑가 막 비 온 뒤끝이라 파릇파릇 웃자라서 대공을 잘근잘근 씹으면 단물이 배어나는 배동 오른 보리밭쯤이면 될랑가 아지랑이 아물아물한 데서 하늘아이들이 시시덕대며 내려와 소꿉놀이하며 풀꽃 따다 밥 짓고 반찬 하고 보리피리 불다 돌아간 뒤 그나마 정든 구천도 어두워지고 살도 뼈도 다 저 갈 데로 가버리면 파릇한 혼백 하나 착하고 뚱뚱한 구름 속으로 둥둥 날아가 왼어깨에는 해를 앉히고 오른어깨에는 달을 얹고 머리카락엔 솜솜 별을 뜯어붙이고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할랑가 할 수나 있을랑가 (그림 : 박준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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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그 저녁에 대하여시(詩)/송진권 2014. 4. 23. 23:17
뭐라 말해야 하나 그 저녁에 대하여 그 저녁 우리 마당에 그득히 마실 오던 별과 달에 대하여 포실하니 분이 나던 감자 양푼을 달무리처럼 둘러앉은 일가들이며 일가들을 따라온 놓아먹이는 개들과 헝겊 덧대 기운 고무신들에 대하여 김치 얹어 감자를 먹으며 앞섶을 열어 젖을 물리던 목소리 우렁우렁하던 수양고모에 대하여 그 고모를 따라온 꼬리 끝에 흰 점이 배긴 개에 대하여 그걸 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겨운 졸음 속으로 지그시 눈 감은 소와 구유 속이며 쇠지랑물 속까지 파고들던 별과 달 슬레이트지붕 너머 묵은 가죽나무가 흩뿌리던 그 저녁빛의 그윽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저녁의 퍼붓는 졸음 속으로 내리던 감자분 같은 보얀 달빛에 대하여 (그림 : 김명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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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배부른 봄밤시(詩)/송진권 2014. 2. 24. 10:58
가마솥 속 같은 밤인데요 늙은 산수유 몸 밖으로 어찌 저리 많은 꽃들을 밀어냈는지 정수리에서 발꿈치까지 온몸에 차조밥 같은 꽃들을 피웠는데요 배고프면 와서 한 숟갈 뜨고 가라고 숟가락 같은 상현달도 걸어놓았구요 건건이 하라고 그 아래 봄동 배추도 무더기 무더기 자랐는데요 생전에 손이 커서 인정 많고 뭘 해도 푸지던 할머니가 일구시던 텃밭 귀퉁이 저승에서 이승으로 막 한상 차려낸 듯한데요 쳐다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데요 이 푸진 밥상 혼자 받기가 뭣해서 꽃그늘 아래 서성이는데 훅 끼치는 할머니 살냄새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엉덩이를 툭툭 치는 할머니가 소복이 차려내신 밥상 그 누런 밥상에 스멀스멀 코흘리개 어린 내가 숟가락을 막 디미는데요 가마솥 속 같은 봄밤 뚜껑을 열자 김이 보얗게 오르는 배부른 봄밤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