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송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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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꿈꾸는 섬시(詩)/송수권 2014. 8. 21. 13:58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내 어린 날은 한 소녀가 지나다니던 길목에 그 소녀가 흘려내리던 눈웃음결 때문에 길섶의 잔풀꽃들도 모두 걸어나와 길을 밝히더니 그 눈웃음결에 밀리어 나는 끝내 눈병이 올라 콩알만한 다래끼를 달고 외눈끔적이로도 길바닥의 돌멩이 하나도 차지 않고 잘도 지내왔더니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슬퍼라 우리 둘이 지나다니던 그 길목 쬐그만 돌 밑에 다래끼에 젖은 눈썹 둘, 빼어 눌러놓고 그 소녀의 발부리에 돌이 채여 그 눈구멍에도 다래끼가 들기를 바랐더니 이승에선 누가 그 몹쓸 돌멩이를 차고 갔는지 눈썹 둘은 비바람에 휘몰려 두 개의 섬으로 앉았으니 말없이 꿈꾸는 저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그림 : 오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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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징검다리시(詩)/송수권 2014. 8. 21. 13:56
햇빛은 산과 들에 부드럽게 빛나고 물결은 풀어져 물방아는 쿵쿵 바둑이가 든 그림책 한 권을 잘도 넘기고 갔다 바둑이 대신 어머니는 자꾸 나를 부르시고..... 지금도 물방앗간 앞을 가로지른 서른 몇 채의 어느 징검돌 위에 서서 나의 다릿심을 풀어내느라 어머니의 손을 내밀고 서서 나를 부른다 아마 그때가 입학하던 첫날이었을 게다 물방아도 봄이 되자 더 힘을 내어 돌고 내 이웃의 소녀들처럼 뒷머리채를 흔들어대며 징검돌들은 흐젓이도 물 속에 처박혔었다 낄낄낄 웃음소리를 내고 도령아 이도령아 내 뒷머리채 못 밟아준 것도 죄지..... 이날은 해가 꼴딱 지도록 어머니와 그 짓을 되풀이하여 내 다릿심이 반남아 풀리는 것을 보았다 팔짝, 팔짝, 쿵, 쿵, 물방아는 돌고 세월은 가고..... 어른이 된 지금에도 아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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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까치밥시(詩)/송수권 2014. 8. 21. 13:51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아이들아, 수많은 기다림의 세월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말아라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이렇게 등 따숩게 비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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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내 사랑은시(詩)/송수권 2014. 8. 21. 13:49
저 산마을 산수유꽃도 지라고 해라 저 아랫뜸 강마을 매화꽃도 지라고 해라 살구꽃도 복사꽃도 앵두꽃도 지라고 해라 하구쪽 배밭의 배꽃들도 지라고 해라 강물 따라가다 이런 꽃들 만나기로소니 하나도 서러울 리 없는 봄날 정작 이 봄은 뺨 부비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때문 저 양지쪽 감나무밭 감잎 움에 햇살 들치는 것 이 봄에는 정작 믿는 것이 있는 때문 연초록 움들처럼 차 오르면서, 해빛에도 부끄러우면서 지금 내 사랑도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크는 것 아니랴 감잎 움에 햇살 들치며 숨가쁘게 숨가쁘게 그와같이 뺨 부비는 것, 소근거리는 것, 내 사랑 저만큼의 기쁨은 되지 않으랴. (그림 : 김영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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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갯메꽃시(詩)/송수권 2014. 8. 21. 13:47
채석강에 와서 세월따라 살며 좋은 그리움 하나는 늘 숨겨놓고 살지 수평선 위에 눈썹같이 걸리는 희미한 낮달 하나 어느 날은 떴다 지다 말다가 이승의 꿈 속에서 피었다 지듯이 평생 사무친 그리움 하나는 바람 파도 끝머리 숨겨놓고 살지 때로는 모래밭에 나와 네 이름 목터지게 부르다 빼마른 줄기 끝 갯메꽃 한 송이로 피어 딸랑딸랑 서러운 종 줄을 흔들기도 하지 어느 날 빈 자리 너도 와서 한번 목터지게 불러 봐, 내가 꾸다꾸다 못 다 꾼 꿈 이 바닷가 썩돌 밑을 파 봐. 거기 해묵은 얼레달 하나 들어 있을 거야 부디 너도 좋은 그리움 하나 거기 묻어놓고 가기를..... (그림 : 신종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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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황포묵시(詩)/송수권 2014. 2. 16. 18:45
오목대에서 나는 쥐눈콩이 전주 비빔밥을 만들었다지 그 비빔밥에 오늘은 황포묵이 먹고 싶다 변산반도 지척으로 눈도 퍼붓는데 계화장 지나 부안 김제 지나 전주 남문시장 밖 어느 허술한 집 상머리에 둘러앉아 그 비빔밥에 황포묵을 들고 싶다 따순 짐 나는 순대국도 한 그릇 치자물을 띄우면 황포묵, 그냥 두루치기면 녹두 청포묵 황포묵 청포묵 그 구수하고 텁수룩하고 못난 잔치 음식들 오늘은 변산반도 지척으로 눈이 쌓이는데 계화장터 지나, 부안장 지나 말목장터 그때 동학군 떨거지들 흰 옷에 털벙거지 한잔 술 곁들고 낯선 사람들끼리 쥐코 밥상머리 둘러앉아 함께 들었듯 그 구수한 황포묵을 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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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 봄날 ,주꾸미회시(詩)/송수권 2014. 2. 16. 18:43
앵두꽃이 피었다 일러라 살구꽃이 피었다 일러라 또 복사꽃도 피었다 일러라 할머니 마루 끝에 나앉아 무연히 앞산을 보신다 등이 간지러운지 자꾸만 등을 긁으신다 올해는 철이 일들었나 보다라고 말하는 사이 그 앞산에도 진달래꽃 분홍 불이 붙었다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즉한 뱃고동이 운다 집집마다 부뚜막엔선 왱병이 울고 야야, 주꾸미 배가 들었구나, 할머니 쩝쩝 입맛을 다신다 빙초산 맛이 입에 들척지근하고 새콤한 것이 달기가 햇뻐꾸기 소리 같다 아버지 주꾸미 한 뭇을 사오셨다 어머니 고추장 된장을 버무려 또 부뚜막의 왱병을 기울이신다 주꾸미 대가리 씹을 때마다 톡톡 알이 터지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 아버지 하신 말씀 니 할매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환장한 환장한 봄날이었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