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서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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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콩깍지 불시(詩)/서정윤 2014. 10. 13. 13:43
무서리 내리자 담장 돌무더기 올라앉은 호박잎 검게 표정 변했다 여름내 논두렁 지키던 콩대 베어 마른 마당에 널어 두드린다 어머니 매질 한 번에 콩깍지는 금세 비틀어져 연노랑 사리를 토한다 마지막 삶의 흔적 내주고 떠나가는 콩깍지 무더기 여분의 사랑 없는 목숨 아궁이에 들어가서 하룻밤 아랫목 데우며 연기 타고 오른다 여물죽 끓이는 불꽃이 마른 콩대와 깍지인 걸 몰랐던 시절 호박잎은 늘 푸름 펼쳐 자존심을 애호박으로 매달곤 했었다 단한 번도 화려하지 않았던 아버지 마른 콩대와 콩깍지 거느리고 불꽃이 되었다 서리 하얗게 내린 담장 아침에 끄덕인다 (그림 : 오수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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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개망초시(詩)/서정윤 2014. 10. 13. 13:25
목쉰 산새 소리 낮게 깔리는 마을 뒷길 당산나무 지나며 도라지 잎으로 떨리는 손이 돌을 얹는다 어린시절 귀신 따라 오지 않게 해달라고 주먹만 한 걸 누이는 깨금발로 올렸다 큰 그늘 휘도는 서늘함 뒷털 세운 메리가 으르렁거리며 따르고 도망치듯 황급한 걸음의 그림자 저만큼 앞서 걸었다 바다 건너 먼 나라로 시집 간 누이 잘살고 있으려니 했더니 가을망초 흔들리듯 말라갔다 흰 꽃 두 송이 달랑 들고서 해식이 웃는 둥 마는 둥 꿈속에 섰다 당산나무 앞에 가 보고 싶었다 누이의 돌이 굴러떨어지지 않았다는 걸 꼭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천년 서 있던 칠불암 석탑 장끼 울음 두 번에 무너지던 날 유년의 마을로 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누이가 떠났다는 소식 망초꽃 밑에 깔린다 칠불암(七佛庵)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남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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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눈물시(詩)/서정윤 2014. 2. 14. 13:48
아직도 가슴에 거짓을 숨기고 있습니다. 늘상 진실을 생각하는 척하며 바로 사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나만은 그 거짓을 알고 있습니다. 나조차 싫어지는 나의 얼굴 아니 어쩌면 싫어하는 척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내 속에 잇는 인간적, 인간적이라는 말로써 인간적이지 못한 것까지 용납하려는 알량한 가 보입니다. 자신도 속이지 못하고 얼굴 붉히며 들키는 바보가 꽃을, 나무를, 하늘을 속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나를 보며 웃습니다. 비웃음이 아닌 그냥 웃음이기에 더욱 아픕니다. 언제쯤이면 나도 가슴 다 보여 주며 웃을 수 있을지요 눈물나는 것이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그림 : 최정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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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사랑한다는 말은시(詩)/서정윤 2014. 2. 14. 13:47
사랑한다는 말은 기다린다는 말인 줄 알았다. 가장 절망적일 때 떠오른 얼굴 그 기다림으로 하여 살아갈 용기를 얻었었다. 기다릴 수 없으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마음은 늘 그대 곁에 있는데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살았다. 그대도 세월을 살아가는 한 방황자인걸 내 슬픔 속에서 알았다. 스스로 와 부딪치는 삶의 무게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한 줄도 모른 채 나는 그대를 무지개로 그려두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떠나갈 수 있음을 이제야 알았다. (그림 : 이존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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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사랑의 전설시(詩)/서정윤 2014. 1. 15. 03:54
사랑은 아름다워라 그대 눈빛을 보고 있으면 나는 촛불이 다 타는 것도 잊고 떨리는 내 그림자를 숨기며 그냥 그대 앞에만 있고 싶어라 사랑은 굳건하여라 나의 생각이 요구하는 어떤 것도 그대를 향한 믿음의 나무보다 튼튼하지 못하고 한갓 말이 부리는 재주에 흔들리지 않는 사랑으로 내 그대에게 다가가리니 사랑은 생명이어라 메마른 마음의 깊은 계곡에 풀이 돋아 꽃을 피우는 사랑은 죽음조차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전설이어라 하지만 사랑은 아픔이어라 그 끝 보이지 않는 오랜 기다림으로도 사랑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어 내 소중한 나를 다 버려도 사랑의 미소는 잡을 수 없다 사랑의 아픔은 더욱 소중하여라 오래 남는다사랑의 상처는 너무 오래 남는다 아득한 시간이 흘러 아픔 사라져도 상처의 흔적은 남아 슬프지 않은 추억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