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서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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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여름날 오후시(詩)/서정윤 2013. 12. 7. 11:59
굵은 빗방울이 내린 지도 한참 되었고 잠시 햇살로 목덜미 따가운 오후 나는 한 그늘을 찾아 가물한 산자락을 밟고 오는 바람을 겨드랑이에 낀 채 키 큰 느티나무 아래에 서면 여름은 무거운 눈꺼풀 위에 잠자리 날개로 내려앉는다. 바람 지나가는 소리들이 나뭇잎 손등에 반짝이고 내내 지친 아낙의 거친 손길, 잊으려 부르는 노래도 지치기는 매한가지 긴 그림자와 함께 돌아서는 언덕길 편히 보낼 날은, 달력에도 없지만 아직 뜨거운 기운이 남아 발길 무겁게 하는 여름날 오후는 길기만 하다. (그림 : 오현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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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산길 오르며시(詩)/서정윤 2013. 12. 7. 11:57
억새들이 한쪽으로 누우며 소리지른다. 바람은 그냥 지나가곤 오지 않는다. 햇볕 따스한 곳 사이좋게 누운 무덤들이 다정하다. 그들이 나누는 얘기들은 지나간 시간의 아쉬움. 아무 소용없는 것들에 얽매여 허비해 버린 삶에 대한 질책조차 시간의 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다. 이젠 그저 한 줌 먼지로 녹아질뿐 이승의 미련은 다 날아가고 억새가 바람에 밀리며 소리지른다. 어디에 누워 뒹굴며 어떤 풀의 뿌리를 위해 내 삶의 나머지를 꽃피워야 하나 지나간 시간은 너무 빨리 가버린다 (그림 : 박광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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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바다에 갈 때가 되어시(詩)/서정윤 2013. 12. 7. 11:56
흔들리는 바다에 섰다. 물결 깊숙이 숨어 있던 침묵들이 일어나 나의 귓가에 매달리며 겨우 달래 놓은 바다를 깨우고 있다. 멀리 돌아앉은 섬. 등대 푸른 의식이 절망으로 무너질 때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뒤로 노을을 지운다. 외면해도 따라오는 나의 그림자. 언제나 내가 먼저라고 말하지 못하고 파도들이 순서대로 달리는 걸 따라 달리고 있다. 침묵 속에 흔들리는 바다만이 나와서 자신을 말할 수 있고 물결은 그래도 흘러갈 뿐 어디서 멈출지 알지 못한다. 흔들리는 바다에 섰다. (그림 : 이승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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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절망시(詩)/서정윤 2013. 12. 7. 11:53
이미 오래 전에 결정되어진 나의 이 아픔이라면 이 정도의 외로움쯤이야 하늘을 보면서도 지울 수 있다 또 얼마나 지난 후에 이보다 더한 고통이 온대도 나에게 나의 황혼을 가질 고독이 있다면 투명한 겨울단풍으로 자신을 지워갈 수만 있다면 내, 알지 못할 변화의 순간들을 부러워 않을 수 있다 밤하늘 윤동주의 별을 보며 그의 바람을 맞으며, 나는 오늘의 이 아픔을 그의 탓으로 돌려 버렸다 헤어짐도 만남처럼 반가운 것이라면 한갓, 인간의 우울쯤이야 흔적없이 지워질 수 있으리라 하루하루가 아픈 오늘의 하늘, 어쩌면 하염없이 울어 버릴 수도 있으련만 무엇에 걸고 살아야 할지 아픔은 아픔으로 끝나주질 않는다. (그림 : 한희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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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윤 - 5월을 맞으며시(詩)/서정윤 2013. 12. 7. 11:45
소리가 키 작은 소리가 밀리어 가다가 어둠이 불어오는 보릿단 위에 엉기어 있다 비가 내린다 습기찬 내 생활의 구석 자리에 눈물의 홀씨들이 모여 저들끼리의 사랑과 고통의 거미줄을 짜고 무엇으로든 비가 내린다 어느새 우리는 우리들이 있던 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왔다. 그 먼 길을 소리로서 되돌아가는 푸른색의 정물화단에 목의 힘으로 하늘을 들어야 하는 키 작은 보리들의 낙서. 내 손에 들려 있는 무거운 하늘이 흔들리고 바람은 또 이렇게 불어오는데 (그림 : 박준은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