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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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풍경에 대하여시(詩)/나종영 2015. 2. 11. 10:47
풍선에 바람이 빠진다면 풍선이 아니다 나는 어렸을 적에 바람이 팽팽한 풍선을 하루내 가지고 놀다가 하늘에 날려보냈다 그 순간 손끝에서 살아난 어떤 떨림이 지금껏 풍선의 이름으로 가슴에 새겨져 있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바닷가 풍경도 나와 풍경 사이에, 물비늘 반짝이는 개펄과 널배를 밀고 가는 아낙과 죽방염(竹防簾)에 갇혀 있는 은빛 멸치떼들 사이에 숨이 끊어질 듯한 긴장감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차창을 스치고 가는 간이역의 풍경일 뿐, 방금 고깃바구니를 이고 내 곁을 지나간 꼬부랑 할머니의 삶이 궁벽하고 쓸쓸한 이 바닷가까지 힘껏 자전거를 타고 와 희망의 편지를 전하여주는 우편배달부의 삶이 바닷가 산비탈 황토밭에서 불타고 있는 누런 보릿대의 흐느낌이 곧 나의 삶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나는 한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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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뒤란의 풍경시(詩)/나종영 2014. 9. 13. 01:38
대숲 바람 소리 대청마루를 건너오고 후박나무가 수런거리는 뒤란에 가면 부추꽃 향기가 너울거렸다 부추꽃 향기는 늘 아픈 회억을 불러오고 시간이 물구나무서듯 장독대 항아리엔 어머니 흰 버선코가 거꾸로 걸려 있다 후박나무 수런거리는 바람의 소요(逍遙), 섬돌 아래 땅강아지 우는 소리에 잠이 깰 즈음이면 낮달이 자분자분 골목 어귀까지 다가와 깊고 오랜 우물에 두레박을 내렸다 오래오래 우물을 들여다보다 어머니 쌀을 씻어 밥물이 내려앉을 때면 토란 이파리에선 또롱또롱 찬 이슬이 굴렀다 대청마루 지나 누룩 냄새 퍼지는 뒤란에 가면 어둔 산 고개 넘어 쫓겨 간 한 사내가 별이 되어 그믐 강물에 떠올랐다는 소문이 돌담 밑 담쟁이 그늘에 돌돌 엉켜 있었다. (그림 : 김주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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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메꽃을 위하여시(詩)/나종영 2014. 8. 24. 08:04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것을 풀숲에 몸을 낮추어 피어있는 너를 보면서야 알았다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한다는 일이 어쩌면 서로를 얽매고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눈시울 젖은 연분홍 너를 보고서야 알았다 애써 너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넝쿨손을 뻗어 네 몸을 감고 있다 이 세상 한 몸을 던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낡은 지붕에 깔리는 노을처럼 얼마나 가슴이 저리는 일이리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손나팔을 모아 푸른 공기 속에 그리움을 부르는 내 사랑이여 사랑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님에야 어찌 사랑을 아니라고 도리질을 칠 수가 있으랴 저녁안개 피어오르는 물가에 앉아 있는 너를 보면서야 알았다 사랑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루만지는 것이라는 것을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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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물잠자리시(詩)/나종영 2013. 12. 25. 12:12
망초꽃 흐드러지게 핀 물숲 가장자리에 물잠자리떼 날고 있다 너울너울 검은 날개를 저으며 물가에 앉았다 바람에 흔들렸다가 가던 길을 가지 않고 저문 물소리 흐느끼는 망초꽃밭을 맴돌고 있다 어디를 에돌다가 늦여름 혀를 빼문 망초꽃 잔돌가에 떼무덤을 만들려는가 보다 어디서 본 듯한 동자승 하나 제 키를 덮는 풀숲 너머로 사라지고 어어 서른 몇 해 전이었던가 네 꽁무니에 지푸라기를 꽂고 진홍빛 성냥불을 사납게 그어대었던 것이 어이 미안하다 내 뺨에 화인(火印)처럼 박혀 있는 검은 날개의 세월이여 그 때 정신없이 염천 하늘로 치솟아 곤두박질쳤던 물잠자리 달빛 으스러지는 망초꽃밭 산그늘 물빛 그윽한 이 곳이 오늘 비로소 물잠자리로 환생한 내 무덤인가 보다 (그림 : 이석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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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내 사랑 각시붕어시(詩)/나종영 2013. 12. 25. 12:12
그날 둘이서 배 터져라 먹었던 꽁보리밥 한 소쿠리 구수한 맛 아직도 입안에 가득한데 흐린 강물 따라 흘러갔나 내 열한 살 시절 양 볼때기 버짐꽃 피어 통마늘로 문지르던 얼굴들 지금은 어디 갔나 맑은 개울가 책보따리 풀어놓고 함께 놀던 버들치 버들붕어 피라미 모래무지 달개비 잎 띄어놓은 아기 연못가 손 모아 불렀던 물방개 소금쟁이 꽃새우 송사리떼 모두 다 어디 갔나 물잠자리 날던 물수세미 물풀 사이 무지갯빛 수놓으며 내 마음 훔쳐간 내 사랑 각시붕어 그날 저 너머 보리밭 강 건너 하늘 멀리 포롱포롱 쇠종다리 날던 내 마음 깨끗한 날 (그림 : 김길상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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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세족(洗足)시(詩)/나종영 2013. 12. 25. 12:12
이 세상 낮고 서늘한 곳으로 내려서고 싶다 누군가 내 발등을 씻어주고 발끝에 입맞춤을 하는 순간, 눈썹이 떨듯 내 마음에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산벚꽃 진 자리에 노랑매미꽃이 피고 어디선가 골짜기 찬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길이 끝나는 어디메쯤 홀연히 날개를 접고 싶었던 좀청실잠자리 물소리 따라 날아가고 있다 가던 길 되돌아보면 아름다워 눈물나는 애기똥풀 코딱지꽃 얼레지 밑씻개풀 키가 낮아 이 세상에 상처 한 잎 내밀지 못한 애잔한 들꽃들의 시린 발등을 나 언제 씻어준 적이 있었던가 마른 꽃잎 적시고 가는 물소리 눈을 뜨면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대들의 삶마냥 낮은 데로 흘러가는 살여울 물가에 남아 오래오래 발목을 적시고 싶다 (그림 : 안인자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