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종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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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선암매시(詩)/나종영 2013. 12. 25. 12:10
은목서나무에서 새가 울고 있더라 무우전(無憂殿) 기와담장 너머로 노을이 지고, 산그늘 어둠이 내리고 운수암 가는 길 선암매 피지 않았더라 오래된 사랑이란 보여주지 않는 것 한 잎 붉은 사랑도 언젠가 늙은 등걸에 드문드문 피는 것 굽이굽이 길 위에 산수유 피고 길 너머 길가에, 노란 생강나무도 피어 마음이 비어있는 내 사랑아 그대 그윽한 꽃향기 같은 봄바람은 깊은 향(香) 차밭을 돌아 하현(下弦) 달빛에 젖고 은목서나무 가지에서 이름 모를 새가 울고 꽃망울 머금은 선암매 아직은 피지 않았더라 선암매 : 순천 선암사에 피는 수 백년 된 토종매화로 이를 仙巖梅라고 부른다. 이른 봄이 되면 선암사 대웅전 뒤 무우전 옆 돌담길에 고목등걸의 홍매화 청매화 설(雪)매화가 구름처럼 어우러져 핀다 (그림 : 김영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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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마음 안에 풀꽃 하나시(詩)/나종영 2013. 12. 25. 12:09
나는 창 밖을 보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대는 창 밖을 보고 한 줄기 아름다운 별빛을 봅니다 나는 숲길을 가며 홀로 외로움에 몸을 떨고 그대는 풀숲을 거닐며 들꽃 향기에 마음이 푸르러집니다 그대는 하얀 눈송이에도 그리운 사람 환한 얼굴을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하찮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찡그린 얼굴이 됩니다 햇살 해맑은 이 아침 새롭게 깨어나고픈 나는 누구입니까 마음 안에 풀꽃 하나, 그대는 이미 사랑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림 : 조안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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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종영 - 우수(雨水)시(詩)/나종영 2013. 12. 25. 12:08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밑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그림 : 박인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