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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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민들레시(詩)/김상미 2019. 9. 6. 11:36
너에게 꼭 한 마디만, 알아듣지 못할 것 뻔히 알면서도, 눈에 어려 노란 꽃, 외로워서 노란 꽃, 너에게 꼭 한 마디 만, 북한산도 북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골목길 처마 밑에 저 혼자 피어 있는 꽃, 다음날 그 다음날 찾아가 보면, 어 느 새 제 몸 다 태워 가벼운 흰 재로 날아다니는, 너에게 꼭 한 마디만, 나도 그렇게 일생에 꼭 한 번 재 같은 사랑 을, 문법도 부호도 필요 없는, 세상이 잊은 듯한 사랑을, 태우다 태우다 하얀 재 되어 오래된 첨탑이나 고요한 새 잔등에 내려앉고 싶어, 온몸 슬픔으로 가득 차 지상에 머 물기 힘들 때, 그렇게 천의 밤과 천의 낮 말없이 깨우며 피어나 말없이 지는, 예쁜 노란 별, 어느 날 문득 내가 잃 어버린 그리움의 꿀맛 같은, 너에게 꼭 한 마디만, (그림 :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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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사생활시(詩)/김상미 2019. 9. 6. 11:34
사생활이 어떠냐고요? 그걸 알아내려면 힘이 들 거예요 제 사생활은 무수한 인용구로 뒤덮여 있으니까요 사생활이 복잡할 것 같아 흥분이 된다고요? 아, 그러지 말아요 당신들이 보고 느끼는 것 그 위에 약간의 연막을 쳐놓았을 뿐이니까요 구별하고 상상하는 건 당신들의 자유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굴절시켜봐도 제 사생활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개방되어 있는 세계지도 같을 걸요 욕망, 슬픔, 권태, 두려움에게까지도 전 아주 정신집중을 잘 하거든요 그러니 개방적일 수밖에 없쟎아요 저는 있고 당신들은 있다는 것 그걸 제외하고 나면 우리들 사생활이라는 게 뭐 별다른 게 있을라고요 생에 대한 확실한 알리바이 그게 무엇이든 그곳에서 청아하게 살아가고 싶은, 그게 제 사생활의 전부예요 당신들은 그렇지 않은가요? (그림 : 이선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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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복사꽃 피는 언덕에서시(詩)/김상미 2019. 9. 6. 11:31
엄마, 복사꽃이 피었어요, 사람 사는 근처에 피어야 더 아름답다는 복사꽃, 복사꽃이 피고 있어요, 전생이 복사꽃이어서 아직도 내게 그 향기가 묻어 있다는 복사꽃, 느껴봐요, 꽃의 숨결, 꽃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 못 잊을 그리움은 저렇게 휘파람으로 부는 것이라며,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저 칼날 같은 꽃향기들, 눈으로 코로 입으로 콸콸 쏟아져 들어오는 그 향기로 진달래 화전 대신 복사꽃 화전을 만들어 먹었어요, 들어봐요, 엄마, 나예요, 나예요, 나라고요, 하며 내 영혼이 조각조각 꽃잎으로 전율하고 있어요, 복사꽃 한 잎 한 잎에 묻은 겹겹의 세월들이 온몸으로 환한 봄 언덕을 물들이고 있어요, 꿈만 같은 봄바람 온 힘으로 앞서가고 있어요, 내 마음 깊이 잠든 엄마까지 깨우며, 이 세상 모든 머릿속 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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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휘파람새시(詩)/김상미 2019. 9. 6. 11:28
내가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그 간절한 목소리처럼 사랑이 내게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사랑은 사랑만으로 존재할 때 보기가 더 좋았다 나는 그 사랑을 내가 아는 사람들과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로 보냈다 그 사랑이 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은 더더 보기가 좋았다 내 사랑의 의자는 늘 비어 있지만 내 사랑의 역사는 늘 앞뒤로 왔다 갔다 하지만 이제는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얼음같이 차가운 내 잠옷을 더 많이 녹여 준다는 걸 알기에 나는 내 정원에 쓰러진 나무 등걸에 앉아서도 기타 줄을 뜯고 놀라운 비밀을 틀어놓는 사람처럼 이제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린다 만약 운명이 있다면 오랫동안 사랑한 그 한 사람이 꽁꽁 언 언덕길을 내려올 때 흘러간 내 사랑의 머리 위로 휘파람새 한 마리 힘차게 날아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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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11월의 부산 중앙동 거리시(詩)/김상미 2018. 11. 1. 15:15
11월의 부산 중앙동 거리 나는 언제나 그 거리를 좋아했다 그곳에서 마시던 커피, 쓰디쓴 소주, 꼬들꼬들했던 갈매기살, 바벨탑처럼 높이 솟아 있던 부산타워…… 때로는 너무 강렬해서 고개를 돌려야 했던 그 거리를 함께 걸었던 희망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꽃다발들은 이미 시들고 11월의 찬바람은 회오리를 일으키며 그 시든 꽃다발들을 꽃다발들의 파편까지도 모두 휩쓸어가 버렸지만 용두산 40계단을 오르며 보았던 어디로 가는지 모를 비행기 한 대 내가 상상한 꿈의 모습으로 높이 날아오르던 비행기 한 대 그 생생한 질주 아래 보름달처럼 꽉 차 있던 내 시선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부산우체국 전화 부스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던 누군가의 우애와 경쾌한 중앙성당의 아침 종소리 더 멀리 보이는 부둣가, 이제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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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소와 나시(詩)/김상미 2017. 11. 25. 19:32
시골 길에서 문득 마주친 소 흙 색깔의 따뜻한 짐승 철썩 꼬리를 치며 정다운 숨결 내뿜는다 만지고 싶고 기대고 싶고 웃어주고 싶은데 왠지 무섭다 어릴 땐 저 소의 젖을 먹으며 소와 함께 하나의 자연이 되어 밭도 갈고 물도 마시고 등 위에 올라타면서 빛나는 별, 미래도 속삭였는데 소와 떨어져 산지 몇 십 년 나는 고독한 아스팔트, 매끄러운 도시인이 되고 소는 잊혀진 첫사랑보다 더 슬프게 멀어져 끔벅끔벅 낯선 이를 보듯 그 큰 눈을 딴 데로 돌리네 한 나라 안에 살면서도 시골과 도시는 이처럼 먼 이국이 되어버렸네 (그림 : 장정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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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폭풍 속으로시(詩)/김상미 2017. 10. 23. 23:01
― 1970년대풍으로 이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넌덜머리가 난다 우리는 우리끼리 만났다 우리끼리 떼 지어 다녔다 핑크 플로이드를 듣고 재니스 조플린을 듣고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스를 따라 불렀다 까마귀떼처럼 백로가 노는 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가 슬픈 뮤지션들 온몸이 서러움으로 만들어진 사람들 어느 곳을 건드려도 툭, 하고 푸른 눈물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노래 가사와 똑 같은 꺾인 길, 굽어진 길, 막다른 길을 돌아다녔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무릎에 붉은 상처가 생겼다 오오, 붉은 상처는 훈장 같아! 우리는 서로의 무릎에 난 상처를 따끗한 혀로 핥았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소박하고 소박한 청춘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소박함이야말로 우아함의 선물이라는 진실 앞에서도 우리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