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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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보리밭시(詩)/김상미 2023. 3. 31. 07:01
보리밭 밟은 지 오래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넘어 대지에 잠복해 있다 떠오르는 것 같던 보리밭 한참을 따라가던 그때가 언제였나 즐거움, 즐거움을 눈 속에 모으며 모든 의미가 철없는 사명감이었던 어린 시절 그때의 우리 몸엔 창문들이 많았다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처럼 몸 구석구석에서 창문들이 소리 내며 열렸다 그때가 언제였나 사방에 적을 두고 친구여,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기껏해야 합리의 소용돌이, 몇 순간 후면 사라질 것들뿐이지만 필필필필 보리피리 불며 찰랑찰랑 넘쳐나는 미래에 억척같던 가난도, 궁색한 땀내도 좀체로 질리지 않던 그때 그 시절 다시 한번 돌아가볼 수 있다면 이 한밤 내리는 눈으로든 비로든 이슬로든 흙투성이 보리밭 그때처럼 밟아보고 싶다 그때가 언제였나 아득한 보리밭 (그림 : 박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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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친구야, 나는......시(詩)/김상미 2023. 3. 25. 13:06
친구야, 나는 너희들이 좋단다 문 가까이 귀를 너무 바짝 대지 마 때로는 문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마음 베일 때도 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너희들의 지적 조심성으로 똑 똑 똑 두드리기만 해 그럼 나 문 열어줄게 문 안의 활력 다 보여줄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사시사철 뜨겁게 찻물 데워놓을게 우린 자꾸 나이들고 틀 속에 갇힐 때가 잦아지지 반쯤은 눈을 뜬 채 악몽을 꾸기도 하지 산발적인 쾌감을 때문에 아무 곳으로나 칼을 던지기도 하지 그러나 라일락 향기 밑이나 노랗게 은행나무 눈부시게 노래하는 길목에선 꼬옥 손을 잡지 숨지 마 돌아서지 마 당당히 당대의 핏줄답게 함께 걸어가자꾸나 나는 너희들이 좋단다 주머니 속에 꼭꼭 숨긴 은장도 나 빼앗지 않을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너희들의 앞가슴 절대 넘보지 않을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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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공수래공수거시(詩)/김상미 2023. 3. 25. 13:00
마음 내려놓고 싶다 해와 달 떠오르는 곳에 꽃 피고 꽃지는 곳에 바람에 우우우 창 흔들리는 곳에 사람과 사람 사이 환유하는 속삭임 속에 마음 내려놓고 싶다 흐르는 물 한 방울에도 집히는 중심 속에 두 갈래 길목에서 고개 드는 지혜속에 마주 오는 사람이 내뿜는 세월 속에 귀에 익은 노랫가락 첨예한 빗방울 속에 마음 내려놓고 이 세상 땅끝까지 태워버릴 것 같던 마음 내려놓고 퍼런 뒷짐이나 지고 싶다 공수래공수거 팔자걸음으로 천하에 배은망덕 팔자걸음으로 (그림 : 차수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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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연륜의 힘시(詩)/김상미 2019. 10. 1. 12:29
주름이 하나 더 늘었다 손가락으로 만져본다 따뜻하다 고뇌가 사랑보다 몸에 더 많은 흔적을 남기는 걸까? 아님 사랑이 고뇌보다 몸에 더 많은 흔적을 남기는 걸까? 꿈꾸듯 거울 속의 나를 본다 저 몸속에서 얼마나 많은 약속들이 꿈들이 힘겹게 뜨겁게 운명의 호미를 들고 고랑을 팠을까 그리고 그 고랑에서 나는 또 얼마나 자주 주저앉고 도망치고 또 일어서려 애썼을까 그 불꽃들이 모여 주름이 되었다는 게 이제는 아프지 않다 나무늘보가 천천히 마음씨 좋은 미소로 나무에 매달리듯 어느 날 문득 깨닫는 늙어감의 미학! 얼마나 멋진 발견인가? 빨리 정신을 차리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든 상관없이 자연스레 내면을 조용히 재편성하는 연륜의 힘! (그림 : 박정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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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천생연분시(詩)/김상미 2019. 10. 1. 12:25
그녀는 가방을 왼쪽에 매고 그는 가방을 오른쪽에 맨다 그들은 서로의 짐 때문에 부딪히는 일도 방해받는 일도 없다 그녀는 오른손잡이이고 그는 왼손잡이이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는 왼손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의 오른손과 왼손을 꼭 붙잡고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간다 손만 놓으면 지금보다 더 좋은 걸 움켜잡을 수도 있고 다른 이들이 부러워할 멋진 왕국도 지을 수 있지만 그들은 오로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간다 두 손을 놓는 게 가장 두려운 일인 듯 두 손을 꼭 잡고 있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인 듯 두 손을 놓칠세라 꼭꼭 잡고 묵묵히, 아주 환하게 (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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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미 - 청진동 해장국집 골목시(詩)/김상미 2019. 10. 1. 12:23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환한 청진동 해장국집 골목 두툼한 월급봉투 앞에 제물로 바친 자신의 꿈 때문에 자꾸만 머리가 벗겨지는 사람들 삼삼오오 마주앉아 캄캄한 저녁 내내, 너는 아니? 너는 아니? 내가 내 꿈에게 무슨 짓 했는지를? 애꿎은 술잔만 내리꽂다 결국 국밥 한 그릇보다 나을 게 없는 어제의 자신 선지국밥에 훌훌 말아먹고 나오는 청진동 해장국집 골목 대낮 벤치 같은 그 곳에 앉아 술잔 깊이로, 깊이로 가라앉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그들의 꿈, 사랑, 자유를 소리쳐 불러본다 불러도, 불러도 돌아오는 건 말줄임표같이 계속되는 세월의 메아리 제 꿈 제가 훔친 줄도 모르고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끝없이 쫑알대며 눈물처럼 전율하는 자기애, 자신 향해 불지르는 자신뿐이지만 내 꿈 내가 뒤돌아보지 않으면 누가 이 무례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