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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밟은 지 오래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넘어
대지에 잠복해 있다 떠오르는 것 같던 보리밭
한참을 따라가던
그때가 언제였나
즐거움, 즐거움을 눈 속에 모으며
모든 의미가
철없는 사명감이었던 어린 시절
그때의 우리 몸엔 창문들이 많았다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처럼
몸 구석구석에서 창문들이 소리 내며 열렸다
그때가 언제였나
사방에 적을 두고
친구여,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기껏해야 합리의 소용돌이,
몇 순간 후면 사라질 것들뿐이지만
필필필필
보리피리 불며
찰랑찰랑 넘쳐나는 미래에
억척같던 가난도, 궁색한 땀내도
좀체로 질리지 않던
그때 그 시절
다시 한번 돌아가볼 수 있다면
이 한밤 내리는 눈으로든
비로든 이슬로든
흙투성이 보리밭
그때처럼 밟아보고 싶다
그때가 언제였나
아득한 보리밭
(그림 : 박준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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