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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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가난은 사람을 늙게 한다시(詩)/김사인 2015. 5. 22. 16:38
삶은 보리 고두밥이 있었네 달라붙는 쉬파리들 있었네 한줌 물고 우물거리던 아이도 있었네 저녁마다 미주알을 우겨넣던 잿간 퍼런 쑥국과 흙내 나는 된장 있었네 저녁 아궁이 앞에는 어둑한 한숨이 있었네 괴어오르던 회충과 빈 놋숟가락과 무 장다리의 노란 봄날이 있었네 자루 빠진 과도와 병뚜껑 빠꿈살이 몇개가 울밑네 숨겨져 있었네 어른들은 물을 떠서 꿀럭꿀럭 마셨네 아이들도 물을 떠서 꼴깍꼴깍 마셨네 보릿고개 바가지 바닥 봄날의 물그림자가 보석 같았네 밤마다 오줌을 쌌네 죽고 싶었네 그때 이미 아이는 반은 늙었네 (그림 : 이원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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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목포시(詩)/김사인 2015. 2. 13. 20:10
배는 뜰 수 없다 하고 여관 따뜻한 아랫목에 엎드려 꿈결인 듯 통통배 소리 듣는다. 그 곁으로 끼룩거리며 몰려다닐 갈매기들을 떠올린다. 희고 둥근 배와 붉은 두 발들 그 희고 둥글고 붉은 것들을 뒤에 남기고 햇빛 잘게 부서지는 난바다 쪽 내 졸음의 통통배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멀어져간다. 옛 애인은 그런데 이 겨울을 잘 건너고 있을까. 묵은 서랍이나 뒤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헐렁한 도꾸리는 입고 희고 둥근 배로 엎드려 테레비를 보다가 붉은 입술 속을 드러낸 채 흰 목을 젖히고 깔깔 웃고 있을지도. 갈매기의 활강처럼 달고 매끄러운 생각들 아내가 알면 혼쭐이 나겠지. 참으려 애쓰다가 끝내 수저를 내려놓고 방문을 탁 닫고 들어갈 게 뻔하지만 옛날 애인은 잘 있는가 늙어가며 문득 생각키는 것이, 아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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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예래바다에 묻다시(詩)/김사인 2014. 10. 30. 01:16
눈감고 내 눈 속 희디흰 바다를 보네 설핏 붉어진 낯이 자랑이었나 그대 알몸은 그리워 이가 갈리더라 하면 믿어는 줄거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손톱만 물어뜯었다 하면 믿어는 줄거나 내 늙음 수줍어 아닌 듯 지나가며 곁눈으로만 그댈 보느니 어쩔거나 그대 철없어 내 입안엔 신 살구 내음만 가득하고 몸은 파계한 젊은 중같아 신열이 오르니 그립다고 그립다고 몸서리치랴 오 빌어먹을, 나는 먼곳에 마음을 벗어두고 온 사내 그대 눈부신 무구함 앞에 상한 짐승처럼 나 속 울음 삼켜 병만 깊어지느니 예래 : 제주도 중문 동쪽 바닷가 마을 (그림 : 양준모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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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네거리에서시(詩)/김사인 2014. 10. 30. 01:10
그럴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손 뻗쳐도 뻗쳐도 와닿는 것은 허전한 바람, 한 줌 바람 그래도 팔 벌리고 애끓어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살 닳는 안타까움인지도 몰라 몰라 아무것도 아닌지도 돌아가 어둠 속 혼자 더듬어 마시는 찬물 한 모금인지도 몰라 깨지 못하는, 그러나 깰 수밖에 없는 한 자리 허망한 꿈인지도 몰라 무심히 떨어지는 갈잎 하나인지도 몰라 그러나 또 무엇일까 고개 돌려도 솟구쳐오르는 울음 같은 이것 끝내 몸부림으로 나를 달려가게 하는 이것 약속도 무엇도 아닌 허망한 기약에 기대어 칼바람 속에 나를 서게 하는 이것 무엇일까 (그림 : 이형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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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고향의 누님시(詩)/김사인 2014. 10. 30. 00:50
한주먹 재처럼 사그라져 먼데 보고 있으면 누님, 무엇이 보이는가요 아무도 없는데요 달려나가 사방으로 소리쳐봐도 사금파리 끝에 하얗게 까무라치는 늦가을 햇살뿐 주인 잃은 지게만 마당 끝에 모로 자빠졌는데요 아아 시렁에 얹힌 메주덩어리처럼 올망졸망 아이들은 천하게 자라 삐져나온 종아리 맨살이 차라리 눈부신데요 현기증처럼 세상 노랗게 흔들리고 흔들리는 세상을 손톱이 자빠지게 할퀴어 잡고 버텨와 한소리 비명으로 마루 끝에 주저앉은 누님 늦가을 스산한 해거름이네요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떠나 소식 없고 부뚜막엔 엎어진 빈 밥주발 헐어진 토담 위로는 오갈든 가난의 호박 넌출만 말라붙어 있는데요 삽짝 너머 저 빈들 끝으로 누님 무엇이 참말 오고 있나요 (그림 : 조규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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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시(詩)/김사인 2014. 10. 30. 00:47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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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전주(全州)시(詩)/김사인 2014. 9. 7. 01:14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하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헤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쯤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타고 놀러 오지 않을라 그러면 나는 국일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