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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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빗방울 화석시(詩)/김사인 2018. 9. 28. 12:02
처마 끝에 비를 걸어 두고 해종일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나 듣고 싶다 밀린 일 저만치 밀어놓고, 몇년 동안 미워했던 사람 일도 다 잊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쫓아다니던 밥벌이 강의도 잊고 빗방울 소리를 듣는 건 오래전 애인의 구두 굽이 길바닥에 부딪는 소리를 듣는 일 가난한 골목길을 따라 퉁퉁 부은 다리로 귀가하는 밤길 긴 통화를 하며 길바닥에 부딪는 똑똑똑 소리를 내 방문 노크 소리처럼 받는 일 툇마루에 앉아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헤아리다가 나는 묵은 편지를 마저 읽으리라 빗방울 받아먹는 귀만큼 귀 깊숙이만큼 꼭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또르르 굴러가던 방울이 쏘옥 들어가 박히던 움푹 팬 자리, 그런 자리 하나쯤 만들어놓고 (그림 : 안창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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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밤 기차시(詩)/김사인 2017. 4. 22. 15:13
모두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잠들어 있다. 왁자하던 입구 쪽 사내들도 턱밑에 하나씩 그늘을 달고 묵묵히 건들거린다. 헤친 앞섶 사이로 런닝 목이 풀 죽은 배춧잎 같다. 조심히 통로를 지나 승무원 사내는 보는 이 없는 객실에 대고 꾸벅 절하고 간다. 가끔은 이런 식의 영원도 있나 몰라. 다만 흘러가는 길고 긴 여행. 기차 혼자 깨어서 간다. 얼비치는 불빛들 옆구리에 매달고 낙타처럼. 무화과 피는 먼 곳 어디 누군가 하나는 깨어 있을까. 기다리고 있을까 이 늙은 기차.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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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바짝 붙어서다시(詩)/김사인 2017. 1. 10. 20:28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그림 : 김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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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노숙시(詩)/김사인 2016. 11. 27. 09:38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그림 : 강연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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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소주는 달다시(詩)/김사인 2016. 5. 12. 17:11
바다 오후 두시 쪽빛도 연한 추봉섬 봉암바다 아무도 없다. 개들은 늙어 그늘로만 비칠거리고 오월 된볕에 몽돌이 익는다. 찐빵처럼 잘 익어 먹음직하지 팥소라도 듬뿍 들었을 듯하지 천리향 치자 냄새 기절할 것 같네 나는 슬퍼서. 저녁 안개 일고 바다는 낯 붉히고 나는 떨리는 흰 손으로 그대에게 닿았던가 닿을 수 없는 옛 생각 돌아앉아 나는 소주를 핥네. 바람 산산해지는데 잔물은 찰박거리는데 아아 어쩌면 좋은가 이렇게 마주 앉아 대체 어쩌면 좋은가. 살은 이렇게 달고 소주도 이렇게 다디단 저무는 바다. 추봉도(秋蜂島) : 경상남도 통영시 한산면(閑山面) 추봉리(秋蜂里)를 이루는 섬. 봉암도(蜂岩島)·추암도(秋岩島)라고도 한다. 통영시에서 남동쪽으로 11㎞, 한산도(閑山島)에서 남동쪽으로 250m 근접한 해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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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삼천포 2시(詩)/김사인 2016. 5. 12. 12:03
할망구는 망할 망구는 그 무신 마실을 길게도 가설랑 해가 쎄를 댓발이나 빼물도록 안 온다 말가 가래 끓는 목에 담배는 뽁뽁 빨면서 화투장이나 쪼물거리고 있겄제 널어논 고기는 쉬가 슬건 말건 손질할 그물은 한짐 쌓아놓고 말이라 캴캴 웃으면서 말이라 살구낭개엔 새잎이 다시 돋는데 이런 날 죽지도 않고 말이라 귀는 먹어 말도 안 듣고 처묵고 손톱만 기는 할미는 말이라 안즐뱅이 나는 뒷간 같은 골방에 처박아놓고 말이라 올봄엔 꽃잎 질 때 따라갈 거라? (그림 : 정의부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