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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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섣달그믐시(詩)/김사인 2016. 2. 27. 01:36
또 한 잔을 부어넣는다 술은 혀와 입안과 목젖을 어루만지며 몸 안의 제 길을 따라 흘러간다 저도 이젠 옛날의 순진하던 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뜨겁고 쓰다 윗목에 웅크린 주모는 벌써 고향 가는 꿈을 꾸나본데 다시 한 잔을 털어놓으며 가만히 내 속에 대고 말한다 수다사(水多寺) 높은 문턱만 다는 아니다 싸구려 유곽의 어둑한 잠 속에도 길은 있다 이만하면 괜찮다 수다사(水多寺) : 경북 구미시 무을면 상송리 연악산에 소재하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신라 문성왕 때 혜소국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졌다. 당시 혜소국사는 연악산의 한 봉우리에 피어난 하얀 연꽃을 보고 그 자리를 찾아가 절을 지은 뒤, 처음에는 ‘연화사’라 불렀다. 조선시대 들어 명종 때에 각원 스님이 ‘성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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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금남여객시(詩)/김사인 2016. 1. 27. 20:52
창틀에 먼지가 보얗던 금남여객 대흥동 버스 차부 제일 구석에나 미안한 듯 끼여 있던 회남행 금남여객 판암동 세천 지나 내탑 동면 오동 지나 몇번은 천장을 들이받고 엉덩이가 얼얼해야 그다음 법수 어부동 '대전 갔다 오시능규, 별고는 읎으시구유'어쩌구 하는데 냅다 덜커덩거리는 바람에, 나까오리를 점잖게 들었다 놓아야 끝나는 인사 일습 마칠 수도 없던 금남여객, 그래도 굴하지 않고 소란통 지나고 나면 다시 '그래 그간 별고는 읎으시구유' 못 마친 인사 소리소리 질러 기어이 마저하고 닳고 닳은 나까오리 들었다 놓던 금남여객 보자기에 꽁공 묶여 머리만 낸 암탉이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금남여객 하루 세차례 오후 네시 반이 막차지만 다섯시 넘어 와도 잘하면 탈 수 있던 금남여객 장마철엔 강물 불어 얼씨구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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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영동에서시(詩)/김사인 2015. 10. 15. 01:08
잎 넓은 감나무 가로수길 되도록 천천히 걸어 바람과 초가을볕에 흠뻑 젖을 일. 읍사무소 뒤켠 그늘 얌전한 아무 식당으로나 슬쩍 스밀 것. 객방은 정갈하고 다만 올갱잇국, 햇정구지도 향기로운 올갱잇국을 한그릇 주문하는 것. 먼저 내온 버섯무침을 맛보며 올갱이 잘 줍던 평복이 누나 영숙이 누나, 푸근하던 웃음과 눈매 떠오르고, 올갱이 줍던 그 희고 통통하던 종아리들 생각나고, 저녁상 물린 뒤 삶은 올갱이 옷핀으로 빼먹던 생각 나고 이빨로 올갱이 꽁지 뚝 땐 다음 단번에 쪽 빨아 먹던 형님들 생각나고 나도 따라 해보다가 이 아파 쩔쩔매던 생각도 나다가 올갱잇국 오고 그 쌉싸름한 맛에 마음 다시 아득해져 꼬지지한 염생이 수염 몇올과 퉁방울눈의 윤 아무개가 있어 막걸리라도 한잔 같이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다 창밖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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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인절미시(詩)/김사인 2015. 10. 5. 13:23
외할머니 떡함지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로 팔러 가시면 나는 잿간 뒤 헌 바자 양지 쪽에 숨겨둔 유릿조각 병뚜껑 부러진 주머니칼 쌍화탕병 손잡이 빠진 과도 터진 오자미 꺼내놓고 쪼물거렸다 한나절이 지나면 그도 심심해 뒷집 암탉이나 애꿎게 쫓다가 신발을 직직 끈다고 막내 이모한테 그예 날벼락을 맞고 김치가 더 많은 수제비 한 사발 눈물 콧물 섞어서 후후 먹었다 스피커에서 따라 배운 '노란 샤쓰' 한 구절을 혼자 흥얼거리다 아랫목에 엎어져 고양이잠을 자고 나면 아침인지 저녁인지 문만 부예 빨개진 한쪽 볼로 무서워 소리치면 군불 때던 이모는 아침이라고 놀리곤 했다 저물어 할머니 돌아오시면 잘 팔린 날은 어찌나 서운턴지 함지에 묻어 남은 콩고물 손가락 끝 쪼글토록 침을 발라 찍어먹고 또 찍어먹고 아아 엄마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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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 서부시장시(詩)/김사인 2015. 8. 13. 20:44
굴 한 다라이를 서둘러 마저 까고 깡통 화톳불에 장작을 보탠다. 시래기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며 테레비 쪽을 힐끗 흘긴다. 누가 당선되건 관심도 없다. 화투판 비광만도 못한 것들이 뭐라고 씨부린다. 판은 벌써 어우러졌다. 추위에 붉어진 코끝에 콧물을 달고 곱은 손으로 패를 쥔다. 인생 그까이꺼 좆도 아닌 거. 옜다 똥피다 그래, 니 처무라 아나 고맙데이 복 받을 끼다 겹겹이 쉐타를 껴입고 질펀한 욕지거리에 배가 부르다. 진 일로 뭉그러진 손가락에 담배를 쥐고 세상 같은 것 믿지 않는다. 바랜 머리칼과 눈빛뿐 믿고 자실 것도 더는 없는 일 인생 그까이꺼 연속극만도 못한 것 고등어 속창보다 더 비린 거. (그림 : 김의창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