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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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고풍의상(古風衣裳)시(詩)/조지훈 2013. 11. 19. 20:54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珠簾)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 밤이 두견(杜鵑)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주빛 호장을 받힌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 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춘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古典)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胡蝶)인 양 사풋이 춤을 추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추어 흰 손을 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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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흙을 만지며시(詩)/조지훈 2013. 11. 19. 14:25
여기 피비린 옥루(玉樓)를 헐고 따사한 햇살에 익어 가는 초가삼간(草家三間)을 나는 짓자. 없는 것 두고는 모두 다 있는 곳에 어쩌면 이 많은 외로움이 그물을 치나. 허공에 박힌 화살을 뽑아 한 자루 호미를 벼루어 보자. 풍기는 흙냄새에 귀기울이면 뉘우침의 눈물에서 꽃이 피누나. 마지막 돌아갈 이 한 줌 흙을 스며서 흐르는 산골 물소리. 여기 가난한 초가를 짓고 푸른 하늘이 사철 넘치는 한 그루 나무를 나는 심자. 있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 어쩌면 이 많은 사랑이 그물을 치나. (그림 : 박현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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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승무(僧舞)시(詩)/조지훈 2013. 11. 17. 23:23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그림 : 박연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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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산중문답시(詩)/조지훈 2013. 11. 16. 20:32
새벽닭 울 때 들에 나가 일하고 달 비친 개울에 호미 씻고 돌아오는 그 맛을 자네 아능가 마당 가 멍석자리 쌉살개오 같이 앉아 저녁을 먹네 아무데나 누워서 드렁드렁 코를 골다가 심심하면 퉁소나 한 가락 부는 그런 멋을 자네가 아능가 구름 속에 들어가 아내랑 밭을 매면 늙은 아내도 이뻐 뵈네 비온 뒤 앞개울 고기 아이들 데리고 난는 맛을 자네 태고(太古)적 살림이라꼬 웃을라능가 큰일 한다고 고장 버리고 떠나간 사람 잘 되어 오는 놈 하나 없네 소원이 뭐가 있능고 해매다 해마다 시절이나 틀림없으라고 비는 것뿐이제 마음 편케 살 수 있도록 그 사람들 나라일이나 잘 하라꼬 하게 내사 다른 소원 아무것도 없네 자네 이 마음을 아능가 노인은 눈을 감고 환하게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뤄 주신다. 예 이 맛을 알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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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사모(思慕)시(詩)/조지훈 2013. 11. 16. 17:55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해야 할 말이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 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울다가 지쳐 멍든 눈 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해 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그림 : 박연옥 화백)